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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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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3.1-4 [2017-06-20 09:04] (현재)
줄 1: 줄 1:
 +==2015년 11월 29일 주일오전설교==
  
 +======말씀을 감당하도록 성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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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말씀:​ 고전 3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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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3:1-4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4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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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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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은 이전 설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도들이 갖는 문제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밀접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장로교회의 장로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언급하면 “나는 성경에 대해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그냥 서슴없이 꺼내는 것을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지 않은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은 아무런 문제가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십년이상이 된 크리스천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발언임에도 이것이 한국에서는 통용이 되고 있으며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기독교 시대에 살고 있다. 바울은 크리스천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대상이 되는 교회들에게 구약성경을 들어 자유롭게 사용하고 인용하였다. 바울 서신서들을 읽어볼 때 그는 매우 논리적이고 광범위한 지식을 다루며 또한 구약성경을 종종 인용하면서 교리들을 가르치고 전달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서들 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이 되어버린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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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교회 - 불려낸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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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을 불러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불려낸 모임”이란 뜻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고 전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즉 교회란 정의부터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어의 church는 “큐리아콘” 즉 “주님께 속한”이란 뜻에서 파생되어 현재의 단어로 정착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속하려하기보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너희는 너희를 부르실 때 허락하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라.”라고 명령하였듯이 주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셨고 이 세상에서 나와 하늘나라를 향하는 순례자의 길로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이 사실을 인식하든 하지 않던 간에 순례자의 길 가운데 경주를 하고 있다. 시편기자는 “나는 땅에서 나그네이오니 주의 명령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라고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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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다. 그가 약속의 땅에 도달하였을 때조차도 그는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건축자가 되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자세를 가르친다. 우리는 이 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앞으로 올 왕국을 사모하며 고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바울은 골 3장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가치관을 더욱 하나님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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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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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후 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예수 우리 [주]를 아는 것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4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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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번역된 단어는 godliness로 예전 성경에서는 “경건”으로 번역되곤 한 단어이다. godliness란 “하나님 같은” 혹은 “하나님께 속한”이란 뜻을 갖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한 권능을 통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과 같이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분과 같이 전지하거나 전능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흠정역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번역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힘입어 즉 우리에게는 믿음이 요구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바라보라.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슬픔과 고난과 박해와 어려움과 고독과 눈물과 연약함이 있는가? 우리가 삶이 주는 무게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종종 낙심하고 낙망하며 주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약속들을 주셨고 우리가 그 약속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힘을 얻기를 원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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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은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능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분을 더욱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분을 아는 것 즉 지식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구약의 호세아서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분이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더욱 알고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주신 성령님을 통해 더욱 그분을 닮아가는 즉 새사람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를 더욱 알게 된다. 그것은 곧 그분의 교제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 안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며 성령님께 더욱 순종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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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후서 1장을 계속보면 주님은 우리가 먼저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할 것을 주문하신다. 이 세상은 계속해서 부패해가고 더욱 어두워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전보다 더 살기 편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갖가지 좋은 것들로 가득해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현재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그 날들은 노아의 날들과 같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 경고하셨듯이 오늘날 영적인 정도 특히 도덕의 수준은 매우 낮아져있고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같은 상황이며 노아의 날들과 같이 땅이 폭력과 더러움으로 가득해있는 상황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 현 세상에 안주하거나 거기 머물러 있어 그 더러움에 묻혀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저번 주에 언급했듯이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며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이르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하실 만큼 하셨지만 절대 자신의 거룩함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신다. 주님은 이 세상의 더러움에 우리가 연루되거나 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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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처음 롯이 아브라함과 나뉘게 되었을 때 그가 본 것은 살기에 좋은 세상처럼 보였던 소돔과 고모라였다. 하지만 그곳은 영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롯은 소돔에서 가까운 곳에 거하다가 그 후 소돔 안에서 살았으며 그 뒤 그는 소돔의 문에 앉아 있었다. 성경에서 도시의 문에 앉아 있다는 것은 어떤 지위를 얻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롯의 가족이 얼마나 소돔의 삶과 일치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롯은 의인이었고 그것으로 그가 본 일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와 그의 가족은 그곳을 사랑하였다. 두 딸은 그곳 사람들과 결혼하였으며 롯의 사위들은 롯이 간청하였을 때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곳을 불과 유황으로 징벌하실 때에 롯은 그의 아내와 그의 가족의 일부를 잃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주님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기를 원하시지 세상의 것과 닮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맡기셨고 그것을 가까이 하시길 원하신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울 것”(행 20:​32)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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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딤후 3:15-17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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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성장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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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구절 말씀으로 돌아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재 짚어 보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마치 어린 아이들을 대하듯 그들을 훈계하고 책망하며 그들의 문제를 지적해야 했다. 지적인 수준으로 본다면 고린도 교회는 만일 오늘날 교회들과 비교한다면 많은 교회들보다도 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교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에도 풍성한 교회였으며 그들은 또한 더 명확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교회이기도 했다. 예를 든다면 고린도전서에는 그들이 바울에게 몇 가지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뜻 즉 신약의 교리들을 물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서신으로 답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7장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의 결혼 문제나 8장에 가서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들이나 9장에서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에 대한 의무에 대한 것들과 11장에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와 12장에서 은사들 즉 선물들에 대한 것들이 담겨 있다. 이 문제들은 오늘날 교회들 안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 교회는 도덕적으로도 오늘날의 여러 교회들보다 더 뛰어난 교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고린도교회의 한 지체가 자기 아버지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일을 허용하는 우를 범했지만 바울의 책망을 듣고 교회는 스스로 징계함으로써 자신을 정결케 하였고 또 죄를 범했던 형제 역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 교회들의 도덕적 수준은 어떠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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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내가 너희를 한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정혼케 했다”는 표현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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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후 11:2 내가 하나님께 속한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순결한 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한 남편에게 너희를 정혼시켰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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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들이 매우 순결한 교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회이지만 바울의 눈에는 매우 수준 낮은 교회에 속하였을 뿐 아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대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생각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분야에 대해 여러분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분야에 대해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과 그 분야를 두고 대화를 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답답한 대화의 전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보다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 깊은 지식을 전해주지는 못하는 난감함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고 그런 영적으로 더 깊은 내용들을 전해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깨닫기에는 영적인 지식수준이 매우 낮은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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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젖은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말한다. 음식은 우리의 영적 감각들을 단련시킬 교리들을 말한다. 어떤 교회들은 음식을 “일곱 개의 심판”이나 일곱 개의 시대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은 그러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말씀의 기초 원리들에 속한다. 음식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데 우리의 감각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 더 이상 젖만을 먹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아이는 혀로 음식의 맛을 분별할 수 있다. 어떤 것은 짜고 어떤 것은 맵고 어떤 것은 달고 어떤 것은 시다. 어떤 것은 상한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오감은 성장과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분별하고 식별한다. 그런데 영적인 문제들은 어떻게 식별하고 분별하여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아는가? 어떤 행동이나 말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그것이 “내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아니한가?​” 일 것이다. 어떤 것들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가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령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 중 하나이다. 주님은 불평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감추어진 의도와 동기로 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말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적이다. 또 한 가지는 영적 직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단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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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주님과의 관계와 관련된 지식을 두고 한 예를 든다면 어떤 좋지 않은 일들을 당하는 성도에게 있어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라면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점검해보려 할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라든지 혹은 삶 가운데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주님의 명령이나 뜻에서 벗어난 어떤 길들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삶 가운데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어떤 사인이 아닐까라는 것들을 살필 것이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나 혹은 지금 하고 있는 어떤 일들이나 혹은 내가 했던 말들 중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내가 돌아서기를 원하는 것이 있는지를 분별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쌓이게 되면 영적 감각은 더욱 단련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 성도라면 그러한 것들을 살필만한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영적으로 어린 성도가 깨닫기 쉽게 하기 위해 더 큰 징계나 사건을 주어서 확실히 알게끔 하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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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더 높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주님의 어떤 일들이나 계획이나 하시는 일들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영적 지식의 깨달음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나 우리가 주님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와 또한 성경에 대한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더 깊은 지식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주님에 대해 이해하는 것에 맞추어 바울은 그들에게 지식을 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로 가시기전 제자들에게 성령님에 대해 더 말씀하고 싶었지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할 것을 아셨기에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바울 역시 히브리 성도들에게 멜기세덱에 대해 더 말하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말하기 어려우니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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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주님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부족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걸었는지가 그 답이 될 것이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고전 3:3) 그것들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바 육신의 일들이다. 그들 가운데 시기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들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보다 육신적인 욕심이 더 앞서기 때문이 아니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기보다 남보다 더 무언가가 항상 뛰어나거나 잘하여 자신이 두드러지기를 원하는 자기만족의 욕심이 더 앞서기 때문이 아닌가?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다툼이 있는 것은 서로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용서가 결여된 것은 나 자신도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으며 주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분열된 것은 하나가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다른 쪽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처럼 걸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갖고 그들의 지혜를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부르셨다. 주님은 더 이상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이 주는 지혜를 따라 걷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적 감각들이 자라나고 단련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대한 것처럼 말씀의 더 깊은 영적인 것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그분과 더 깊이 교제하며 그분의 뜻과 계획과 목적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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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아브라함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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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씨를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이삭이 주어지기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에 있어 여러 가지 시련도 있었지만 그의 믿음은 자라났고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약속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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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4:19-21 그가 백 세쯤 되었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이제는 죽은 자기 몸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가 죽은 것도 고려하지 아니하였으며 20 믿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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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으며 그 약속대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인하여 성장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더욱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영적 지식을 얻었다. 그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행하시는 분”에 대해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성장하였을 때에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사랑하는 이삭을 그분께서 지정하시는 한 산에서 번제 헌물로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도 목적도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 때 아브라함은 “내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라고 불평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는 시련과 같은 이 일이 주어졌을 때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얼 말씀하시려는지 이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행하시는 분”이심은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얻음으로써 입증되었고 자기 앞에 이삭은 지금까지 자라왔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주어진 매우 괴로운 시련을 두고 주님의 뜻을 얼마나 묵상했을지 생각해본다. 주님의 명령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칼을 들어 그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얼마나 아브라함에게 괴로운 것인지 생각해보라. 그것도 희생물로 드리는 것은 각을 떠야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그것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내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분명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실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가운데 그 괴로운 일을 하는 명령을 따르고자 이삭과 함께 그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자기 아들을 묶고 칼을 들어 올렸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죽는 것을 막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으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내가 이제 아노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결과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교제와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어린 양이 보이지 않아 그것이 “어디 있나이까?​” 라고 물었던 이삭에게 무어라 답변했는가?​ “내 아들아,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창 22:8) 아브라함은 믿음의 답변을 그 때 드린 것이다. 그 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지에 대한 어렴풋한 계시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불렀다. 여호와이레란 “여호와께서 보여주시다” 혹은 “여호와께서 보여주실 것이다” 혹은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란 뜻을 갖는다. 우리 성경에서도 그 의미를 두고 사람들이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계시를 얻었으며 그분과 더 깊은 교제를 얻었다. 주님은 그를 “내 친구 아브라함”이라 부르셨다.
 +
 +그런데 아브라함이 만일 그가 성장하지 못하였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 아마 그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이 주는 약속을 힘입어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삭을 얻었고 그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자라서 그분께서 그러한 명령을 주실지라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에까지 이르렀다.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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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5장에서 바울은 히브리 성도들이 성장하지 못한 까닭에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며 그러한 까닭에 의의 말씀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데 이르지 못하였음을 책망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에 이르면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들과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지혜를 따라 걷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교제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고전3.1-4.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