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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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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4.1-5 [2018-02-25 15:37]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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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25일 주일오전설교==
  
 +======청지기직의 요구사항과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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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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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4:1-5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2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니라. 참으로 나는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나는 판단 받을 아무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되지는 아니하였나니 오직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시니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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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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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가진 은사들 혹은 선물들을 자랑하는 교회였다. 하지만 그 교회는 그 은사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망각하였다. 그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섬기기보다 자랑하며 서로 갈라지고 다투었으며 서로 경쟁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가진 것들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고 물으며 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달란트를 주셨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모두는 서로 같지 아니한 달란트들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께서는 그분이 뜻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은사들을 주셨다.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이제 그 은사들은 주어진 목적에 따라 제대로 사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은사들은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들은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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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 주에 살던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부자는 자기 아버지의 생일이 되면 특별한 것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한 번은 다섯 개 국어를 말할 줄 알고 “텍사스의 노란 장미”란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앵무새를 보았다. 그 부자는 이 특별한 앵무새를 아버지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거금을 주어 그것을 샀다. 그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앵무새라 생각하며 만족해했고 그것을 생일 선물로 아버지에게 주었다. 몇 주 후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아버지,​ 그 새 어땠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거 정말 맛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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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 즉 은사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일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장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땅을 파서 그것을 거기에 감추었다(마 25:18). 주님은 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각 사람이 선물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선물을 써서 섬기라.”(벧전 4:10)라고 크리스천들에게 권면하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맡겨졌음을 말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은혜들을 맡은 청지기라는 것을 가르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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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청지기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청지기로 번역된 단어는 “오이코노모스”인데 이것은 “운영 혹은 행정, 관리”를 뜻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천사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졌으며 그분의 말씀 역시 우리에게 맡겨졌으며 주님을 섬기는 사역 역시 우리에게 맡겨졌으며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신약의 건전한 교리 역시 우리에게 맡겨졌다. 우리는 이것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뿐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서로 섬길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각자는 은사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은사들 혹은 선물들을 써서 서로 섬기라고 사도 베드로는 권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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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청지기와 관련한 몇 가지 정보들을 얻게 된다. 참고적으로 또한 누가복음 12장에는 마지막 날들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청지기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시간이 없어 누가복음 12장은 살피지 못하므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주님은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 12:​35)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오실 것을 준비하며 또한 깨어 있어야 한다. 곧 심판하시는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4장을 통해 어떤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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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청지기직에 요구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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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 교회는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 분파를 만들었고 서로 각자가 주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자기들을 높이 세웠다. 한 사람은 바울파라 하고 한 사람은 게바파라 하고 한 사람은 아볼로파라 하며 서로 자기들을 특별한 위치에 놓으려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명성이 있는 사람들을 따라가고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은 그들 역시 명성이 있는 그 사람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자들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바울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를 원하며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 역시 아볼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고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교회들에서 서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치켜세우며 자신들이 그 사람 파라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약 이천년 전에 주어진 사도 바울의 책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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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자신이나 게바인 베드로나 아볼로나 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아니고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역자”로 번역된 단어는 “휴페이레테스”란 단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겔리선 즉 전함의 하층에서 노를 젓던 노예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게바나 아볼로나 자신이나 모두 전함이 목적하는 바로 나아가기 위해 명령 아래 놓인 사람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배의 선장이 아니고 모두 노 젓는 노예인데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을 이유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들은 배의 하층에 있기 때문에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선장의 명령에 순종하여 노를 저을 뿐이다. 또한 노를 젓는 자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는 효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최악의 경우 배는 원을 그릴 뿐 이동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38년을 보내야 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크리스천 청지기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자세는 자신의 은사들로 인해 우쭐대는 자세가 아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많은 은사들을 가졌다 하여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들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하며 모두가 다 배의 하층에서 노 젓는 자들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것들을 맡은 자들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딤전 6:7) 우리는 질서와 권위에 순종하는 자들이나 서로를 향해 동료의식이 필요한 일꾼들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같이 섬기는 사람들이 명성이 있든지 그렇지 아니하든지 간에 그들을 부를 때 “동료 일꾼”(빌 4:3, 살전 3:2, 몬 1:1)이라 불렀다. 여러분과 나는 주님을 섬기는 동료 일꾼들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는 종이지만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안에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 종이었으며 그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었음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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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전 4:2) 청지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관리하므로 그에게 필요한 최고의 덕목은 “신실함”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찾으신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께서 하신 칭찬은 “착하고 신실한 종”이었다. 청지기의 책무는 자신의 주인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갈 6:10을 보면 교회는 “믿음의 집안”으로 불리고 있다. 청지기는 어쩌면 그 가족의 일원들을 기쁘게 하지 못할 수 있지만 만일 자신이 하는 일이 청지기의 주인을 기쁘게 한다면 그는 좋은 청지기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그의 주인에게 달려있은즉 참으로 그가 세워지리니 [하나님]은 그를 서게 하실 수 있느니라.”(롬 14:4)라고 말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종이 인정을 받는 대상은 다른 동료 종이 아니라 그의 주인인 그리스도시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인가?​ 고린도 성도들은 서로 분파를 나누어 바울파니 게바파니 아볼로파니 하며 서로 “누가 더 유명한가?​ 누가 더 명성이 많은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게바나 아볼로나 바울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들에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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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사람이었다(민 12:7)고 증언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온 집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그는 많은 비난과 비방과 불평을 들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명령에 언제나 신실하게 순종하는 청지기였다. 모세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서 판단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청지기는 끊임없이 판단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누군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며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청지기직과 관련하여 판단 혹은 심판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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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니라.”**(3절) 바울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거나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하여도 그것으로 분노하거나 분개하지 아니하였다. 사실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의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반역자 혹은 배도자라 보며 그를 죽이려 하였으며 크리스천들 가운데 사도 바울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는 가였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갈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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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것은 “사람의 판단”이라는 표현에서 “판단”은 원어로 “헤이메라” 즉 “날들”이란 뜻이다. (“헤이메라”는 일반적으로 “날” 혹은 “날들”(day,​ days)로 번역되고 가끔 “세대”(age) 혹은 “여러 해”(years)로 번역되나 “판단”으로 번역된 경우는 이 구절이 유일하다. 판단 혹은 심판의 의미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그리스 단어는 “크리시스”이다.) 즉 “사람의 날들로 판단을 받는 것이”가 원래의 의미이다. 성경을 보면 “날들”이 “심판의 날들”을 의미하는 경우들이 간간히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주의 날”을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을 뜻한다. 지금은 사람의 날들로 사람이 판단하며 자기 눈에 옳은 대로 걸으며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때이지만 “그리스도의 날”이 되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 앞에 서서 보상을 위해 심판을 받을 것이며 주의 날에 모든 세상이 그분에게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즉 크리스천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바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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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나는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나는 판단 받을 아무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되지는 아니하였나니”**(3-4절)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무시한 것은 아니나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스스로 판단한다 하여도 판단 받을 만한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의롭게 되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판단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동기들은 때로 자신에게도 감추어져 있다. 주님만이 우리 안의 감추어진 마음의 동기와 의도들을 분별하실 수 있으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달아보신다.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깨끗한 마음의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두 경우 모두 자신에게서 스스로 판단 받을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자신이 놓이지 아니하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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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시니라.”**(4절) 가장 올바른 판단 혹은 심판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마음의 동기들을 살피시고 숨겨진 의도들을 분별해내신다. 특히 4절에서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앞으로 구원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통해 심판을 받겠지만 현재에도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히 4:12-13)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며 또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어 양심이 살아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동료 크리스천이나 교회를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올바로 판단하여 죄를 직면하고 그것을 자백하도록 이끄신다(마 18:15-17).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함께 심판받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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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아니고 자신의 판단도 아니며 오직 주님의 판단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판단해서는 아니되는가?​ 분명 누군가는 이 구절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마 7:1)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절대 아무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았던가?​ 고린도 교회 안에 죄가 있었을 때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한 그 사람을 쫓아낼 것을 명령하고 우쭐해 있는 교회를 책망하지 않았던가?​ 우리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해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께서도 “참으로 또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7) 하셨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오히려 “판단하라”는 명령이 더 많이 성경에서 주어지지 않던가?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무조건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일들이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의도들을 모르기 때문에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음을 언제나 인정하고 결론적인 판단을 피해야 함을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마음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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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청지기에게 주어진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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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다른 사람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다시 돌아오시면 그 때에 그분의 모든 종들은 주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삶과 행동들과 주님을 섬기던 모든 것들이 빛에 의해 드러나고 마음의 숨겨진 동기들 역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을 자를 알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하여 이새의 맏아들을 보고 흡족해 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을 보신다.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 16:7)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두고 판단하며 서로 누구누구 파라 하였는데 사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역시 쉽게 범하는 죄가 아닌가? 우리는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사람을 잘못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자기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며 율법을 판단하는 자니라. 그러나 만일 네가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판단하는 자로다. 12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한 분 계시는데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약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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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우리는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음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변치 아니하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살아온 인생의 길에서 각자만의 삶의 체험들이 있다. 그 체험들을 통해 각자가 편견과 선호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역자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때를 생각해보라. 그런 것 자체가 지금 사도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사역자들의 가치를 따지고 평가하며 순위를 매긴다. “그들이 율법과 증언에게 구할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 8:20) 주님은 자신의 율법의 말씀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그 율법을 “판단의 법도”라 부르셨다. 우리는 시편기자가 “내가 주의 명령들을 믿었사오니 선한 판단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66)라고 기도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한 판단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래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레위인들을 그들 가운데 두고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일을 행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은 각자의 눈에 옳은 대로 행하며 걸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판단의 법도를 잊었다. 사사기는 두 번에 걸쳐(삿 17:6, 21:25)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명기 말씀을 통해 경고하셨던 것이었다. “또한 너희는 우리가 이 날 여기에서 행하는 모든 것 즉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본받아 행하지 말지니라.”(신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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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우리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음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에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열어 그 안에 있는 의도들을 꺼내어 명확히 파악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앞에 감추어지고 흑암 가운데 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실 때에 가능한 일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존재했던 것은 그 의도가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인 동기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특정한 사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여러 가지 좋은 말들로 그들의 행동이 포장되고 미화되어 나타났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악을 가리고자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포장하기도 하지 않는가? 사울 왕은 자신의 왕국이 다윗에게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윗의 선한 행동들을 악하게 이야기하여 그를 죽일 것을 명령하였고 또 다윗을 시기하고 견제하던 사람들은 사울 왕의 말에 동조하고 그 명령에 편승하였음을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는 때로 서로 티격태격하고 싸우기도 하며 또 각자의 나름의 동기들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나 사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동기들을 아시고 그것들을 의로운 기준과 판단으로 평가하시고 각자를 칭찬하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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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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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받은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에 대해 신실한 자들이 되었는가?​ 때로 삶은 우리를 지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잊도록 만든다. 우리는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받는 자들이 된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주께서 오셔서 모든 것들을 심판의 자리로 가져갈 때를 바라보고 우리의 모든 수고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음을 소망하자.
고전4.1-5.txt · 마지막 수정: 2018-02-25 15:37 작성자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