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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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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2.7-10 [2017-06-20 09:0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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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0월 18일 주일오전설교==
 +==제 12회 창립예배==
 +======역경을 통한 성장======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고후 12:7-10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
 +=====서론=====
 +
 +인생의 삶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역경이다. 누구나 편안하고 고난도 없고 어떤 역경도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경을 통해 자신의 성도들을 성장하게 하고 무언가를 가르치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불필요한 것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필요한 것으로 보신다. 사람마다 겪는 역경의 정도 및 그 방식도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지체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환경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경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자라나고 성장하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
 +
 +매 중에서 “낙상매”라 불리는 매가 있다. 어릴 때 둥지에서 힘이 없어 밑으로 떨어진 매를 낙상매라 불린다. 그런데 이 낙상매가 오히려 고난 없이 자란 매보다 값어치가 높다고 한다. 이유는 한 번 떨어진 고통을 본 매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모든 것에 악착같이 행한다고 한다. 그로인해 사냥을 할 때에도 웬만하여도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경이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
 +
 +=====I. 창조의 목적=====
 +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현대 사회는 바쁜 일정 뿐 아니라 삶의 많은 염려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깊이 사고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아이들은 게임으로 인해 자신의 삶의 목적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 삶의 목적이 마치 구원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직 초점이 자신의 구원에게로만 맞추어져 있는 사람과 같다. 성경의 다른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구원받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는 목적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 중 일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과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
 +엡 1:4-6상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5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 6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느니라. ​
 +
 +엡 1:11-14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12 이것은 먼저 그리스도를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 13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 14 이 영께서는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
 +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알리고 또 찬양받으시고자 계획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자 목적이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주님께서 기도하신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길 간구하고 계신다. 그 일은 우리를 향한 구원 계획인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시어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
 +=====II. 하나님 중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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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과 목적은 단지 우리가 위로 받고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함에 있지 않다. 주님은 그보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그것은 성령님의 통제 가운데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의를 이루고 화평과 기쁨이 넘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분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며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 있기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걸음을 가질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자아”를 처리하시고자 우리에게 역경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원하시는 삶은 이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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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아시는 분으로써 그분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
 +
 +골 1:27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
 +골로새서 말씀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리스도” 즉 인격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성령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삼위의 한 분으로 우리 안에 한 인격체로 계신다. 그런데 “자아”의 처리가 우리가 그분께 인도함을 받으며 순종하는 일에 대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여기서 “내가”는 나의 옛 사람 즉 “자아”이다. 이 자아는 약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같이 처형되어 십자가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에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 그것은 여러분은 이제 옛사람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처형된 자가 되었고 새 사람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제 우리가 옛 사람 즉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 즉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주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자아를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무의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죽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해. 이제 주님께서 일하시고 나는 가만히만 있으면 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혹은 자아를 죽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우리가 “죽은 자”에 대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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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자는 먼저 말이 없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의 욕망이나 바램을 성령님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자아를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자신의 욕망이나 뜻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내 자신 즉 내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자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 하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성령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이 쉽게 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역경이나 고난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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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행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누구를 왕좌에 앉혔는가?​ 나인가? 아니면 성령님이신가?​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할 때조차도 자기중심적인 삶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즉 성령님의 이끄심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믿음을 말할 때가 있으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어떤 사역을 맡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사고 가운데 자신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지 아신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목적조차 자기중심적인 사람도 있다. 즉 이런 사람은 구원받는 목적 역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다. 구원을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다가 이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변해가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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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14:7-9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죽지 아니하는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일어나사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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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의 삶에도 역경은 있었다. 그는 주의 일들로 인해 많은 고난들과 역경을 겪어 왔지만 특별히 그는 한 역경을 언급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 역경이 사도 바울을 성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계시를 얻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계시를 얻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매우 자고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얻었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봤다고 한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든지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울의 계시에 비교한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역경을 주셨다. 그 역경이 주어진 목적에 대해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바울이 얻은 계시보다 더 많은 계시를 얻은 사도들이 있었는가?​ 없다. 그는 신약성경의 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으로 신약 크리스천을 위한 많은 계시들을 보았고 들었다. 그에게는 계시가 넘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자고하지 못하도록 즉 분량 이상으로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기에 그에게 역경을 허락하셨다. 바울이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주님을 원치 아니하셨다. 설령 바울이 자기중심적이 되어 즉 성령님의 뜻보다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뜻대로 행하고자 하여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은 사도 바울이 겸손하기를 원하였다. 주님은 바울에게 겸손을 가르치시고자 대단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에 한 가시를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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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삶에 찾아오는 역경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역경도 헛되이 혹은 우연히 오는 것은 없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을 두고 또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고자 혹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자기에게 찾아온 역경을 두고 주님께 세 번 아뢰어 그것을 제거해 주시길 간구하였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역경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아니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우리의 간구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세 번째 기도에 응답하시어 말씀하셨다. 그 이전까지는 주님은 침묵하셨거나 때를 기다리셨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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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역경은 하나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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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역경을 좋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를 몸으로 괴롭게 하거나 마음을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재정적인 압박이 여러분의 가정을 무겁게 할 때에 우리 중 대부분은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지 못할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다쳤거나 혹은 만성적인 질병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중 대부분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직장이나 친구 중에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두고 나에게 붙여주신 것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미울 뿐일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역경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며 어떤 경우는 사탄의 역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두고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 안에 주어진 가시 즉 사탄의 사자가 바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그 일에 대해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반역하였다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또한 바울은 그 육체 안의 가시가 자기에 어떤 일을 이루는지를 알았을 때에 주님께 많은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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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역경도 그 일을 당하는 당사자의 기분에서는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도 자기에게 주어진 역경을 두고 주님께 세 번 간구하였을 정도로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을 매우 심하게 짓누르고 괴롭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일이 주님으로 온 것이었지만 그것은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가 기분 좋아하는 것만을 주시지 않으신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한다고 사탕만을 먹으라고 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그들의 건강이 되는 것들을 먹이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 역경을 허락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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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역경 즉 고난을 당하게 되면 흔히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다. 그 사람에게 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의로운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그를 찾아왔던 세 친구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욥이 의롭게 자신을 보였어도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 그를 비난하였다. 그에게 감추어진 죄가 있다면 그것을 자백하고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강력히 말하였다(욥기 31장). 그러나 모든 고난이나 역경이 그 사람의 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태어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였던 그 사람에 대해 제자들은 그 사람의 역경이 누구로 인하여 온 것인지 궁금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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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9:1-3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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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도 그 사람의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답변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역경을 당하였고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의 평생 동안 그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으며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바울은 그것이 자신에게 많은 계시들이 주어졌으므로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으려고 주님이 주셨음을 알았을 뿐이었다. 성경은 바울에게 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었을까하고 우리가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바울의 평생동안 그의 몸 안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바울은 괴로워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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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이나 역경을 당하면 우리는 곧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역경을 두고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며 심지어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알았을 때에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으며 오히려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은 또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 혼자가 아니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역경 아래 놓여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친절하지 않으며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혹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역경을 통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친절과 호의를 경험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하나님 가까이 있었으며 언제나 그분의 뜻대로 걷고자 하였다.
 +
 +역경을 두고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라.  ​
 +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고후 12:9-10)
 +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울이 자신이 평생을 지니고 산 그 육체의 가시를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바울을 겸손하게 하였고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이 연약한 사람임을 인지하게 하였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육체를 신뢰하지 않게 하였으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자신의 육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역사하기를 바라였다는 것이다. 그 역경은 바울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의 몸 안에 있던 가시는 분명 사탄의 사자였으나 그것은 또한 족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호의였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고난이고 역경이며 은혜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두고 바울의 반응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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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두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역경 안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더욱 크게 역사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에게 육체에 고통과 고난을 준다하여도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약할 때에 내가 강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역경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보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더욱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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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이나 역경을 당할 때 그것을 견디어내는 힘은 자신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필경 낙심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채울 것이다. 바울은 역경을 당할 때 그것을 견디어 내는 힘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을 단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어떤 일들을 행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고난이나 역경을 허락하실 때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역경을 두고 “그리스도로 인하여”라 말하였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분의 뜻과 그분의 영광과 그분이 높아지는 것을 더욱 원하는 삶이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걷는 삶이었다. 우리는 역경을 당하는 크리스천이 어찌 그리스도께 영광이 될 것인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역경이나 고난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것은 그의 죄 문제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을 우리가 부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려는 그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역경이 주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기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강해지기를 간구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가 역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
 +그것은 또한 역경을 당하는 크리스천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
 +벧전 4: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2 그런즉 그는 육체 안에서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리라.
 +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은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더 구하고 그분의 뜻을 묻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이 주어진 것이 나를 거룩하게 하려는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면 이제 그것이 주어진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러할 때 그 역경으로 인해 괴로워하기보다 그것을 기뻐하라.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지 물으며 그것으로 인해 낙심하거나 괴로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주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더욱 하나님 중심으로 더욱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깨달으라. 또한 역경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기를 간구하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의 역경을 통해 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라.
 +
 +=====결론=====
 +
 +빌 3:10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
 +바울은 자신의 역경과 고난에 대해 적극적이고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역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냐에 따라 그것이 자신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히 다름을 아는가?
고후12.7-10.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