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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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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12-17 [2017-06-20 09:0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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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24일 주일오전설교==
  
 +======그리스도로 옷 입자======
 +
 +골로새서 3장 12-17절
 +
 +=====서론=====
 +
 +5월은 언제나 가정과 관련한 설교를 준비하곤 했지만 올 해는 그러지 못한 거 같아 잠깐 요한복음을 내려놓고 가정과 관련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 그것은 가정의 모든 일원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의무를 다할 때 결과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먼저 가정을 세우셨다.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보이시고자 하셨다. 자녀들이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창조주가 되심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부모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사랑하며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사랑하며 또한 돌보신다. 자녀의 마땅한 의무는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인 사람들에게서 높임을 받고 또한 경배와 섬김을 받기 원하신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 ​
 +
 +엡 5:31-33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32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각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듯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가정들이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모습대로 세워지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마귀는 가정을 무너뜨리고자 여러 가지 시험들을 가정의 지체들에게 가져온다. 오늘날 이혼하고 갈라지는 가정의 수가 늘어가고 있다. 가정이 갈라지는 많은 요인들이 있는데 그 중 사람들은 종종 배우자의 간음이나 성격차이나 혹은 재정적인 문제를 거론하곤 한다. 그런데 어떤 가정도 그냥 두어도 문제없이 갈 가정은 없다. 모든 지체가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소홀이 한다면 가정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각 지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무를 주셨다.
 +
 +골 3:18-21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19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주]를 매우 기쁘게 하느니라. 21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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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짧은 네 구절 안에 가정의 지체들의 의무와 책임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가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목록화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핵심이 되는 원리만 주셨다. 나머지는 그 원리에 맞추어 각자가 판단하여 행할 것을 지정하신 것이다.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언제나 아내들에게 먼저 명령을 준다.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내가 남편보다 더 열등해서 그런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주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시듯이 남편과 아내에게도 질서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그 뒤 돕는 조력자로써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 교회가 순종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자의 복종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 뒤 남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이렇다. “너희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라.” 남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와 더 강한 그릇이라는 점을 이용해 아내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신다.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한 사랑의 상징이다. 따라서 남편의 사랑은 헌신적이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자녀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다음과 같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들은 자기 뜻대로 원하는 대로 행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도 독립된 인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자녀들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길 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원하시는 것과 같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에 대해서는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자기의 뜻만 고집하고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는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 낙담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 대해 그분의 뜻대로 걷기를 원하시지만 강제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걷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리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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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원리를 따라 걷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 육신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며 육신의 만족이 되는 것을 추구하려 한다. 또한 마귀는 크리스천 가정을 무너뜨리고자 하고 있다.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크리스천 가정을 위해 필요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을 청하고 있다. 사실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2-17절은 우리에게 그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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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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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3:12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입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벗었음을 말한다. 9절에서 바울은 거듭난 사람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었음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과 신뢰를 둔 그 순간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옛 사람의 권능 아래 있지 아니하게 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허물과 죄로 죽은 본성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성령님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 즉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골 3:10)를 입었다. 그것은 영적인 사람으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육신의 본성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것을 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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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생각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입고 13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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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는 합당치 아니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임을 언급하며 그에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것을 청한다. 먼저 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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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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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는가?​ 그 시점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및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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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엡 1:4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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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시점이 “세상의 창건 이전”임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우리의 어떤 의로움이나 장점이 있거나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만한 것들이 있어서가 아님을 보여준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미리 아심을 통해 우리를 택하였어도 우리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사람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미리 아심 가운데 우리를 택하셨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점을 야곱과 에서에 비유하면서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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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9:11-13 (그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그때에 그분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이것은 기록된바,​ 야곱은 내가 사랑하되 에서는 미워하였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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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인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구원에 있어 역사하는지에 대해 종종 우리는 극단으로 가곤 한다. 한 부류는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붙들어 하나님의 선택만 강조하곤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해버린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은 미리 아심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였다. 한 부류는 엡 1:4을 해석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함으로써 누군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건 이전에 선택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자들의 혜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롬 8:​28-29절은 예정한 사람들이 누구고 그들을 주님이 어떻게 부르셨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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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8:29-30 그분께서는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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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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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한 자들임을 기억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기보다 거룩히 구별한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단어와 거룩히 구별함과 성도는 다 같은 단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를 이 세상에서 따로 떼어 이제 하나님을 섬기도록 거룩히 구별하셨다. 고전 6:​19-20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자들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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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6:19-20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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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구약에서 제사장들을 주님께서 거룩히 구별하시는 것과 같다. 제사장들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주님을 가까이 부르도록 세워진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셨으며 주님을 섬기며 또한 그분께 합당한 입술의 열매를 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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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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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선택하셨음을 생각해보라. 구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 어떤 자랑한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크리스천의 상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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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7:6-8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니라. {주} 네 [하나님]께서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 위로 너를 높여 자신에게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주}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 8 다만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셨으므로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시므로 {주}께서 강한 손으로 너희를 데리고 나오시고 너희를 노예들의 집에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구속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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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하나님과 크리스천과의 관계는 가정의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아버지와 자녀는 사랑으로 묶여 있으며 자녀들을 돌보는 동기는 “사랑”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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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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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고 무한하다.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차별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용서하겠다고 하시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만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들의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에 대한 심판을 대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들이 용서받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어떤 호의를 받을만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그분께서 거룩히 구별하셨으며 그분의 사랑을 받고 죄들의 용서를 받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이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았기에 주님은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성품과 연관이 있다. 이제 바울은 여덟가지 은혜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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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긍휼히 여기는 심정. 여기 심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창자”이다. 우리는 긍휼이란 감정이 나오는 곳을 마음에 두지만 그리스인들은 창자에 두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긍휼을 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상해를 받았다. 그런데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를 보고 돌아서 다른 쪽으로 갔으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데려다가 여관에 데려다 돌보아 주고 또한 여관주인에게 그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오늘날 세상은 긍휼을 미덕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악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듯이 우리 역시 서로에게 긍휼히 여기는 심정을 갖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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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친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친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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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딛 3:4-7 사람을 향한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친절과 사랑이 나타난 뒤에 5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6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 7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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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서로 친절히 대하라”(엡 4:32)고 명령하신다. 성경에서 친절에 대한 좋은 예는 다윗 왕이 요나단의 아들 무비보셋을 돌보던 일에 있다(삼하 9:1-13). 무비보셋은 두 발을 절었다. 다윗은 사울의 집안에 공의를 행하기보다 남아있는 자가 누구이든 친절을 베풀기를 원하였고 다윗 왕은 무비보세으로 하여금 왕의 상에 같이 참여하게 하였으며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친절과 같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여기서는 아웅다웅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하늘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으로써 살아갈 것을 마음에 두라.
 +
 +3. 겸손한 생각. 주님은 겸손한 생각을 품으시기를 십자가에 낮추기까지 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겸손한 생각을 원치 아니한다. 그들은 찬사와 교만을 높인다. 겸손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오히려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자신에 대해 높아지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시 131편에서 다윗은 “어머니의 젖을 뗀 아이와 같이 내 자신을 평온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아이는 젖을 떼는 것을 원치 아니하나 떼어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에 자신을 맞추듯이 우리 역시 때로 나 자신의 원함이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을 때 마치 젖을 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라도 자신을 평온하게 하는 것 즉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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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온유함. 흔히 온유함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온유하다고 하셨으며 구약에서 모세는 땅위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모세를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는 온유한 것에서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는 종종 화를 내었고 엄격하였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온유함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앞에서 통제하는 힘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힘을 뜻한다. 마치 말은 말탄 자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말탄 자의 통제에 순종하는 것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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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오래 참음. 이 말은 오랫동안 화를 내지 아니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것은 충동적인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굴복시키는 힘을 말한다. 자신을 화나게 하거나 분노를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억제하는 힘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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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참음. 이것은 억제하거나 붙들어 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 자신의 심판을 집행하는 것을 참으셨다. 온유와 오래 참음과 참음은 많은 면에서 함께 역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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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용서.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이 서로를 향해 오래 참거나 슬픔을 이겨내는 것만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더 적극적인 마음 즉 그리스도께서 악한 죄인들인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를 향해 용서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대상을 향해 악의적인 생각이 올라오고 쓴뿌리가 돋아나 여러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
 +히 12:15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
 +
 +8. 사랑. 8이란 숫자는 새로움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들이다. 크리스천이 가져야할 덕목 중 가장 으뜸은 사랑이다.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 중 가장 처음으로 나오며 사랑은 모든 은혜들을 효과적이 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부족하면 다른 은혜들은 그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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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그리스도의 화평이 다스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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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3:15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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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입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성품과 연관이 있다. 그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평 즉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이것은 우리의 행함과 연관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걷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여러 답 중 하나는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와 간구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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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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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평은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는 곧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화평을 잃어버릴 것이다. 다윗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화평을 잃었던 경험이 있었다. 시편 32편이나 51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화평이 우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다스린다는 것은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마치 운동경기에서 심판이 모든 경기의 룰을 지배하듯이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모든 걸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맞추어 걷는 것이 하나님의 화평을 잃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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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거짓된 화평이 우리 생각을 지배할 수 있다. 가령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그 배는 곧 풍랑을 만났지만 요나는 마치 화평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 마냥 배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화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짓된 화평이 생각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내 마음을 지배하는 화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서 온 것인지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일반적인 가장 쉬운 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있으냐 있지 아니하느냐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서 어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화평을 줄 수 있겠는가?​ 종종 크리스천은 화평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화평의 부족을 육신이나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려는 경형이 있다. ​
 +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것은 하나님의 화평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함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화평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도 화평을 누릴 것이다. 우리 역시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온 몸의 지체들이 서로가 화평 가운데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듯이 우리 역시 서로 화평을 누리며 서로 인정하며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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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II.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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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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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으려면 그리스도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부히 거하게 해야 한다. 골로새 교회는 세상 철학과 유대주의와 여러 인본주의적인 교리들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던 때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할 것을 명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그들을 구원한 것은 거짓 교리들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었다. 그 동일한 말씀이 우리에게 영적 생명과 힘과 지혜를 준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은 우리 안에 거하는 말씀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안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는가? 먼저 말씀에 대한 암송이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알고자하는 묵상이 요구될 것이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이다. 세 번째 말씀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동의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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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바울은 이 말씀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는 매우 위험한 때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함으로써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단적인 교리로 넘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고자 하며 또 마음에 간직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내도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한다면 우리의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 특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 않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르치기 보다 다른 수단들을 동원한다. 찬양 프로그램이나 혹은 워십 댄스나 혹은 교제나 혹은 ccm과 같은 것들로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가르치는 자에게는 많은 공부를 요하고 받는 자들에게는 따분함을 이기는 것이 필요하나 사람들은 감성적인 뭔가를 더 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를 파괴하는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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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찬양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경배를 위한 것이다. 찬양은 영적 노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기 보다 우리의 영에 자극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영을 자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구약의 시편을 읽어보라. 시편은 우리의 영을 자극하는 영적인 노래들이다. 찬송은 또한 은혜로 주께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부르는 것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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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말하였고 그 결과 기쁨과 감사와 복종이 주어진 것처럼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할 것을 말하고 그 결과 역시 기쁨과 감사와 복종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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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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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3:17 또 너희가 말이나 행위로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며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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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 사회이다. 사인은 그 사람의 것임을 뜻한다. 서명은 권위를 뜻하기도 한다. 관공서에서 특히 대통령의 사인은 권위를 가지고 실행함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세 번 나오는데 처음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란 의미에서 경멸하고자 붙였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 이름은 크리스도의 이름을 붙드는 자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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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우리의 모든 말이나 행위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함을 보인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더러움을 드러내는 것인가? 주님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행위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의 특권이자 책임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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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종종 가문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가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가족의 어느 누구도 자기 가문을 더럽히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빛내고 높이고자 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족 안에 있는 자들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영광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행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걸맞게 걷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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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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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정의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그러한 성품을 갖고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도록 그분의 뜻을 따라 걸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나 행위를 하도록 그리스도로 옷 입자.
골3.12-17.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