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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11-27
2012년 11월18일 주일 오전설교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

본문말씀: 누가복음 19장 11-27절

서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후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삼일 후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주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약속은 그분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것이다. 이보다 믿는 성도의 마음을 강하게 동기부여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물론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고 육신을 따라 걸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란 약속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보다 근심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주님께 대해 미안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분분의 경우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길 소망하고 그 약속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 특히 장로교회들은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를 가르치고 믿는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올 때부터 그 교리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다. 전천년적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들 역시 휴거의 소망을 잊은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휴거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사건들로 말미암아 여러 교회들이 휴거의 가르침을 버리거나 혹은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로 돌아섰으며 휴거를 믿기는 하되 적극적으로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날은 매우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통해 보여준 대언의 말씀들에 따라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가고 시대의 때가 그날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휴거의 날은 알 수 없지만 그 때는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 24:32-33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 33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주님은 원하실까? 바울은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고 권면한다.

살전 5:4-10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 5 너희는 다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니라.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자. 7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느니라. 8 그러나 낮에 속한 우리는 정신을 차려 믿음과 사랑의 흉갑을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자.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 10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자신과 함께 살게 하려 함이라. 11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너희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우라.

오늘 우리가 보려는 성경구절 역시 주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 주님은 과연 우리가 무엇하기를 원하실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눅 19:11 그들이 이것들을 들을 때에 그분께서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즉시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더라.

먼저 문맥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눅 19:11-27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11절에서 그것을 명확히 하셨다. 종종 사람들은 “비유”라는 단어가 나오면 성경 전체가 비유로 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무료성경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키운 “신천지”가 그 중 하나에 해당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마 13:34)다는 성경구절을 들어 모든 것이 비유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어느 때가 되어 주님은 비유를 사용하기 시작하셨다. 그 시점이 바로 마태복음 13장이다. 왜 그러한가? 마 13장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비유는 두 가지 목적으로 주어진다. 첫 번째 목적은 우리가 비유를 사용하는 그 이유에 있다. 종종 우리 역시 비유를 사용한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는데 잘 설명하기가 어렵거나 상대방이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으면 비유를 사용한다.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과 같다”라고 하면 지금 현재의 마음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깨닫을 수 있도록 비유를 사용하셨다.

마 13:34-35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것은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되 창세로부터 은밀히 간직된 것들을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비유를 사용하는 두 번째 목적은 비유를 사용하는 자와 비유를 듣는 자와의 공통된 이해의 개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감추고자 할 때 사용된다. 일제시대의 시들 중에는 그런 시들이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소망을 표현하나 그대로 말하지 않고 자연의 현상을 이용한다든지 하여 읽는 자가 시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시의 해석을 잘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육사의 청포도가 그러하다.

마 13:10-16 제자들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하매 11 그분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12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니라. 14 이사야의 대언이 그들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보므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왕국에 대한 신비들을 제자들은 이해하기를 원하였어도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감추고자 하셨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자 왕으로써 오신 분이심을 기적과 이적들을 통해 보여주셨지만 주님을 영접하기보다 그분이 마귀들의 통치자인 “바알세붑”을 힘입어 마귀들을 내쫒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분을 완전히 배척하였다. 그 일로 말미암아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멀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마 12장에서 그들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죄들에 대해 경고하셨으나(마 12:31-32) 계속해서 그들이 거부하자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버지께서 너희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아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마 21:43)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 6:9-12 그분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대답하시되, 도시들이 피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땅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며 12 또 주가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 땅 한가운데에 버림당하는 일이 심히 많을 때까지니라.

즉 이사야에서 인용된 부분의 뜻은 이사야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지 아니할 때까지, 그리하여 주님께서 더 이상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지 아니할 때까지 전하라는 것이다. 즉 인용된 부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의 기회를 닫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 13장에서 주님께서 사 6:10-11을 인용한 것은 주님께서 더 이상 그분을 거부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하기위해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하신 일과 동일하다. 먼저 파라오는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때가 되자 주님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하신 능력이 나타나도록 그를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셨다.

눅 19장에서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듣는 회중이 주님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이 비유의 목적은 첫 번째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왕이 되시어 당시 로마의 지배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즉각적으로 정치적으로 회복케 하실 것이라 생각했다. 주님은 그에 대해 이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회복하는 때는 아직 멀었음을 보여주시고자 했다. 12절에서 주님은 “먼 나라”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을 알려주셨다. 두 번째 목적은 주님께서 곧 그들에게서 떠나실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왕으로써 오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다. 세번째로 주님은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는 동안 종들이 어떻게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자 하셨다.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관리/장사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눅 19:12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귀족이 자기를 위해 왕권을 받은 뒤에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귀족이 자기를 위해 왕권을 받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님은 듣는 회중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잘 깨닫도록 그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 역사적 사실이란 헤롯 대왕의 아들 “아켈라오”(마 2:22)에 대한 것이었다.

마 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대신하여 유대에서 통치한다는 것을 그가 듣고는 거기로 가기를 두려워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옆으로 돌이켜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가

당시에 유대의 왕이 되려면 그때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황제 시이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도 로마로 가서 마크안토니 황제의 허락을 받아 유대의 왕으로 취임했었다.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 대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아켈레오가 왕위를 계승할 입장에 놓였다. 헤롯대왕은 죽기 직전에 자신이 다스리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세 아들, 즉 안티파스, 빌립, 아켈레오에게 분할해 주었다. 아켈레오는 먼저 로마의 황제 시이저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아켈레오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로마로 간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유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켈레오는 왕이 될 자격이 없으며, 그의 인격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50명을 국민의 대표로 선정해 로마에 파송, 아켈레오가 왕으로 인준받는 것을 방해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편 유대 땅에서는 아켈레오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운동도 있었다. 로마로 찾아간 아켈레오는 로마의 황제에게 찾아가서, 철저하게 로마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유대의 왕이 되어도 좋다는 로마 황제의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켈레오는 왕위를 가지고 다시 자기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자기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던 사람들을 다 처형하고, 자기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관직을 주는 보상을 베풀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던 청중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도를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 어떤 귀족은 예수님을 뜻한다. 그것은 비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먼 나라는 주님께서 가시게 될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을 뜻한다.

눅 19:13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십 므나를 건네주며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 하니라.

비유 속의 주님은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각각 일 므나씩을 건네주고 그들에게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의 비유는 마 25:14-30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의 비유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비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누가복음의 비유에는 “열 사람의 종”이 등장한다. 성경에서 “열”(10)은 이방인의 숫자를 뜻한다. 이것을 알아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책이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를 대상으로 쓰여졌다. 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설명하며 또한 여기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하늘의 왕국”이란 표현이 있다. 이 하늘의 왕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왕국을 의미한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란 대상의 차이로 인해 각각의 비유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종의 처분이 서로 다르다. 누가복음에서는 손수건에 므나를 싸고 간직하였던 종은 그 므나를 빼앗긴 것이 전부이다.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그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진다.

누가복음에는 열 사람들에게 총 십 므나를 주어 각 사람이 일 므나를 받으나 마태복음의 비유에는 각 종들이 “각 사람의 개별적인 능력에 따라”(마 25:15) 받아 그들이 받는 달란트가 서로 다르다. 그로인해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님은 오 달란트로 오 달란트를 더 만들고 이 달란트로 이 달란트를 더 벌었던 종들에게 동일한 보상을 주셨다.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마 25:21,23) 달란트 비유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가르친다:

  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허락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대로 100% 활용하기를 원하신다. 각 사람은 100%의 수익을 얻었다.
  3.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주어진 달란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보상을 주신다. 이것은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적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나 주님께 동일하게 신실하였다면 주님은 동일한 보상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즉 능력이 많다고 해서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적은 능력이 주어졌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라. 주님은 여러분의 능력을 아시고 그 능력대로 신실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능력의 많고 적음대로 보상하시지 아니하고 신실함에 따라 보상하신다.
  4. “있는 자마다 받아서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적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낙심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모든 보상을 잃게 만들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무익한” 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반대로 므나의 비유는 각 사람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신 것은 무엇인가? 강단에 서있는 목사나 설교를 들으러 앉아있는 여러분이나 동일하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 먼저 우리 모두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복음이 주어졌다. 또한 우리 모두는 한 성령을 받았으며 동일한 성령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는 동일한 특권이 주어졌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동일한 특권과 권리를 받은 종으로써 서 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의 왕좌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은 동일한 기회에서 얼마만큼의 유익을 남기느냐에 있다. 므나의 비유 속의 종들은 각각 한 므나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열 므나를 벌었으며 이것은 1000%의 배율을 남긴 것이다. 한 사람은 오 므나를 벌었고 이 사람도 500%의 배율을 남겼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남기셨는가?

“내가 올 때까지 관리하라.” 확인해보니 예전 초판에서는 “장사하라”로 되어 있던 부분이 “관리하라”로 바뀌었다.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장사하라”가 더 올바른 번역이라고 판단이 된다. 영어는 “Occupy”로 되어 있다. 이 의미는 지금은 “차지하다, 전념하다, 종사하다”란 뜻을 갖고 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의미는 “무엇인가에 돈이나 물질을 투자함으로써 이득을 얻다”란 의미가 강하다. 15절을 보면 “장사해서 … 벌었는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장사하라”가 더 맞는 번역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특권과 권리와 복음등을 통해 우리가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것이 기도라면 주님은 기도를 통해 여러분이 유익을 남기길 원하신다. 만일 그것이 복음이라면 주님은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짐으로써 여러분이 유익을 얻게 되길 원하신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주님은 여러분이 깨닫는데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어찌하든지간에 주님은 각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에 대해 최대의 유익을 얻게 되길 원하신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유익을 얼마나 얻는지에 따른 개개인의 신실함의 차이에 따라 우리에게 맡길 권세의 크기도 달라짐을 보여주신다. 십 므나를 벌은 종에게 주님은 “잘하였도다, 선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은즉 열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차지하라.”라고 말씀하셨고 오 므나를 벌은 종에게는 “다섯 도시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에 있다.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신실함으로 기다리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마땅한 보상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눅 19:14 그런데 그의 국민들은 그를 미워하고 그가 간 뒤에 소식을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비유 속의 국민들이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였듯이 주님의 백성이던 이스라엘은 주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써 그들의 왕으로 오신 것을 거부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카이사르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외쳤다. 주님은 이들에게 강한 경고를 하고 계신다. 그들은 아켈레오가 왕권을 가지고 돌아온 후에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자들을 모두 처형했던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의 왕은 자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들이 알게 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아니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날이 이르기 전 우리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눅 19:15 그가 왕권을 받은 뒤에 돌아와서 자기가 돈을 준 이 종들이 각각 장사해서 얼마나 벌었는지 알기 위해 이들을 부르라고 명령하니

때가 되면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부르실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얼마나 섬겼는지에 대해 우리가 받은 므나를 두고 얼마나 유익을 얻었는지에 대해 주님께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그분을 섬기는 종으로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눅 19:16 이에 첫째가 와서 이르되, 주여, 주의 일 므나로 십 므나를 벌었나이다, 하매 눅 19:17 그가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선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은즉 열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차지하라, 하니라. 눅 19:18 또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여, 주의 일 므나로 오 므나를 벌었나이다, 하매 눅 19:19 그가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르되, 너도 다섯 도시를 다스리라, 하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은즉”이라고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되는지 생각해보라. 한 므나는 오늘날로 치면 삼 개월치의 월급에 해당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자기 종들이 여전히 신실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종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므나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들은 “주의 일 므나”로 말한다.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므나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눅 19:20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여, 보소서. 주의 일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나이다. 눅 19:21 주께서 엄한 사람이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나니 주께서는 맡기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시나이다, 하매 눅 19:22 그가 그에게 이르되, 사악한 종아, 네 입에서 나오는 말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니 너는 내가 맡기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도다. 눅 19:23 그러면 어찌하여 네가 내 돈을 은행에 넣어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더라면 내가 올 때에 이자와 함께 내 것을 요구하였으리라, 하고 눅 19:24 곁에 서 있던 자들에게 이르되, 그에게서 일 므나를 빼앗아 십 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 하매 눅 19:2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주여, 그에게는 십 므나가 있나이다, 하더라.) 눅 19: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있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신 한 므나에 대해 유익이나 이득을 얻지 못하고 손수건에 싸서 보관한 채 가지고 있다가 주님께 드린 사람의 문제는 그가 주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주님에 대해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가?

먼저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에 대해 잘못되이 알고 있었기에,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므나를 가지고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기도도 성경을 알아가는 것도 주님을 알아가는 것도 복음전하는 것도 그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단지 목사들이나 세움을 얻은 집사들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주님이 엄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주님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주의 두려움이 필요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주님을 섬기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말한다. 그는 주님은 “맡기지 아니한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가신다”고 생각했다. “맡기지 아니한 것을 가져가시고”라는 표현보다 “내려놓지 아니한 것을 취해가시고”란 표현이 합당할 것 같다. 우리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땅에 먼저 작물을 심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주님은 추수하시는 분으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분명 하나님께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구원받게 만드실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어짜피 주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어짜피 성경 잘 몰라도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운 일은 없다.” 여러분은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므나를 손수건에 싸서 보관하고 있는 것과 같다. 누군가 구원받으려면 혹은 누군가 성장하려면 말씀의 씨앗이 마음 밭에 뿌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람은 주님께서 부당하게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준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므나는 약 석달치의 월급에 해당한다. 이것은 많다고 여기면 많은 것이고 적다고 여기면 적은 양이 될 수 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므나가 주님을 섬기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은 없는 것에서 취해가셔서 섬김을 받으려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주님께서 전쟁에 자기 사람을 보내는데 자기 비용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는 분으로 주님을 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힘은 미약하고 주님을 섬길만한 어떤 능력이나 자원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낭비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만큼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주님을 섬겨나갈 때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영적인 법칙에는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주님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번 종에게 주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동일한 므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눅 19:27 그러나 내가 자기들을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 저 내 원수들은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아켈레오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처형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던 유대인들은 그 댓가로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로마군대는 금을 캐기 위해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뜨림으로써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를 이루었다. 또한 이 말씀은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비유의 표현대로 성취될 것이다. 그 때가 이르기전 주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회개에 이르기를 부르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결론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한 므나씩 주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다. 주님은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유익을 만들기를 원하신다. 왜 그러한가? 주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이 때에도 신실하기를 원하신다. 신실함의 차이가 다스릴 도시들의 수의 차이를 결정한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주님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면서 단지 섬김을 받으며 나에게서 착취하려는 엄한 분으로 생각하고 계시는가? 여러분의 므나는 어디있는가? 만일 손수건에 쌓여 있다면 이제 그것을 꺼내어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눅19.11-27.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