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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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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7.12-14 [2018-01-28 15:49]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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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월 28일 주일오전설교==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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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장 12-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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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 17:12-14 ¶ 영화로우며 높은 왕좌는 처음부터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이니라. 13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모든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샘이신 {주}를 버렸기 때문이니이다. 14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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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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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언자로 불림을 받은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 중 여럿이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주신 말씀을 전하였으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거부당하였으며 백성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호소하였으나 거부당하곤 하였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예레미야도 그런 대언자였다. 그는 분명 슬픔으로 눈물을 적시던 대언자였으며 자신의 민족의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보던 자였다. 그는 자신의 민족이 멸망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는 것을 보고 그들엑 호소하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보려 노력하였으나 모든 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 혼 안에서 탄식하며 괴로워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소망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성소를 두며 살지 아니하였다면 그는 매우 낙담하고 마음이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그는 많은 시간을 홀로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거기서 소망을 찾으며 힘을 얻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은 시편 119편일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예레미야가 가장 유력한 자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걷고자 하는 자인지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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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많은 시간들은 고생과 고난과 낙심과 고달픔과 상처와 괴로움을 가득해 있다. 분명 달콤하고 아름다운 날들도 많으나 더 많은 날들이 흑암으로 덮여 있고 불투명한 미래가 앞에 놓여 있다. 예레미야 처럼 소망을 상실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주지도 아니하며 고난과 핍박이 그를 찾아오는 날에도 그가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오늘 본문이 그 비결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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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참된 성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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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다. 그렇다면 열 지파의 수도인 사마리아인가?​ 그렇지 않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요 4:21)라고 하셨다.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듯 로마에 참된 성소가 있는가? 그곳은 성경에 따르면 “마귀들의 처소가 되고 모든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며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계 18:2)일 뿐이다.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려고 모인 이 교회당 역시 성소가 있는 곳이 아니다. 성소가 있는 곳은 우리 하나님 바로 그분에게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시 46:1)라고 노래하였으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주}여,​ 주는 모든 세대에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라고 기도했다. 예레미야 역시 “영화로우며 높은 왕좌는 처음부터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이니라.”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의 성소를 보여주며 이 양식으로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으며 이 땅위에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하는 곳이 세워졌고 또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세워져서 그곳을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아름다운 성소라 부르게 되었어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장소인 성소는 하나님께서 앉아계시는 “영화로우며 높은 왕좌”에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히 4:16) 수 있게 되었지만 참된 성소의 위치는 변한 적이 없었다. 실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구약의 사람들은 모형인 성막이나 성전을 통해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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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또한 참된 성소의 성격을 보여준다.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고 높은 왕좌”에 앉아 계신다. 주님은 통치의 자리에 앉아 계신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분의 주권 아래 놓여 있으며 그분의 허락없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없다. 우리가 우연으로 보이는 일들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른 것이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보이나 하나님께서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이끄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서는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왕이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통치하시니 온 땅은 기뻐할지니라”와 같은 찬양을 부를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분노 가운데 대할 것이다. 그들은 이 진리를 참을 수 없어 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악인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공평하게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 내리기게 하시며 그분의 긍휼 가운데 우리가 살게 하여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 역시 그분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다. 주님은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생명과 사망의 문제가 달려있으며 또한 그 권능 역시 하나님께 놓여 있다는 것과 그분께는 죄들의 용서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주목하는 많은 이유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다루심에 있어 공평하게 그들을 대하시나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의를 베푸신다. 이들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자기들의 불법을 씻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세 이전에 선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며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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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런 말들은 자유의지가 있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 인식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느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냐?​”(마 20:15)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뜻으로 모든 것들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실 권한이 있으신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라,​ 오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어진 것이 자기를 지은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같은 덩어리의 진흙으로 한 그릇을 만들어 존귀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를 만들어 수치에 이르게 할 권한이 없겠느냐?​”(롬 9:20-21) 그분의 주권은 논쟁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심판이 공정하게 하실 것이다. 만일 누군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에 가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들로 인하여 가게 될 것이다. 그분의 은혜의 선택 역시 그분의 미리 아심을 근거로 행해졌다.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은 바로 이런 절대적인 통치와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 앉아 계시는 영화롭고 높은 왕좌이다. 합당치 아니한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가 바로 우리가 도움을 청하고 달려가는 그 왕좌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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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주권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분의 권능을 당연히 인정한다. 영화롭고 높은 왕좌는 권능의 왕좌이다. 만일 어떤 왕좌가 권능 혹은 권력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허영의 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왕에게는 반드시 권력이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가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고 하며 그분의 역사를 막을 자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모든 자연을 통해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세상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보이신다. 우리는 며칠 동안 굉장히 추운 날씨를 보냈다. 바람을 일으키시고 눈보라를 보내시며 바다의 요동치는 파도의 교만을 멈추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명령에 비가 내리며 푸른 세상이 자라난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의 행로를 따라 움직이며 그분의 계획을 이룬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는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을 그들의 마음에 두사 동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들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의 왕국을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느니라.”(계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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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롭고 높은 왕좌는 권능의 왕좌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뜻하시고 목적하신 모든 것들을 성취하실 권능을 소유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크리스천에게 어떤 위로를 주는가?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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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롭고 높은 왕좌는 지속하는 영광을 지니신 분의 자리이다. 그분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으며 아무도 그분께 지혜를 빌려줄 수 없으며 그분의 거룩하심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시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하늘보다 더 높다. 그런 분께서 자신의 영을 자신이 택하신 자들 속에 두시고 그들을 깨우치시고 분별력을 주사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여전히 더욱더 풍성해지고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빌 1:​9-10)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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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는 영화롭고 높은 왕좌는 “처음부터” 우리의 성소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계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래로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계획과 목적은 변치 아니하시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큰 사랑 역시 변치 아니하신다. 솔로몬은 “내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리라.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무엇을 뺄 수 없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라.”(전 3:14) 라고 말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불변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주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나니 18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도피한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불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확고한 안위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성소는 도움을 청하고자 피난처로 삼는 곳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그분을 상징하는 성소로 나아갔다. 히브리 기자가 말하듯이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고 그곳으로 도피한 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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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언자는 우리의 성소가 왕좌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에 자연적으로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게 계시하는 곳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나 그분은 이 땅에 있는 자들에게 특별하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다. 구약에서 통상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던 곳은 성전이었다.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기명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계시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었다. 가령 성소 안에는 일곱 등잔대가 유일한 빛이었으며 제사장들은 그 빛으로 나아가고 그 빛을 통해 주님을 섬길 수 있었다.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갔으며 그곳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사람들을 다루셔왔다. 그 언약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가 있으며 그것은 두 그룹이 날개를 서로 맞대어 있다. 성소의 모든 재료들 역시 상징하는 것들이 있었다. 금은 영원과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며 은은 의로움과 구속을 상징하고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전이 어디에 세워졌는가?​ 바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던 그 산이다. 그 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예언을 주셨으며 그 예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아버지의 희생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구원의 왕좌로 삼으셨음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야 하며 반드시 그곳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그분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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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는 참되시고 영원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특별한 장소로 나아갔다. 성막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성막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분을 찾으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찬양하고 경배하였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성막은 예루살렘에 놓이게 되었으며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세워졌다. 그곳에는 유대인들과 여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 마련되었으며 어느 누구나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나 공간의 제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은 처음부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많은 시들을 작성하였으나 정작 그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는 원수의 수중 가운데 있던 때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 제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점을 명확히 하셨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요 4:23-24)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로 계시된 하나님 안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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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했듯이 성소는 피난처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로 우리가 위험의 때에 피하는 장소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진노와 죄들에 대한 심판을 피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왔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유혹과 시험에서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또한 우리의 피난처는 여러 슬픔과 고난과 고통과 혼란의 때에 주님 안에 있다. “{주}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해 주시기를 원하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개 아래로 의지하러 온 네게 충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이 영화롭고 높은 왕좌는 영원하고 지속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피난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갈 것이니라.”(히 4:16) “나의 구원과 나의 영광이 [하나님] 안에 있나니 곧 내 힘의 반석과 내 피난처가 [하나님] 안에 있도다. 8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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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주를 버리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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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모든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샘이신 {주}를 버렸기 때문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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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실족하는 일이 있으며 “주를 버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사막을 얻고자 강을 버리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산 자들을 떠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주를 버리는 자들은 처음부터 주를 알지 못하던 자들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를 알았던 자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분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는가?​ 예레미야가 말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주의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던 이교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던 자들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또한 자신의 대언자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불리던 자들이며 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이집트에서 올라오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섞어 사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들도 그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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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에서 올라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매우 큰 기적을 보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늘에서 천사들의 음식을 내려주셨고 마실 물을 주었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버렸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먹던 갖가지 음식을 기억하며 만나를 폄하하였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과 이적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위하여 상을 마련할 수 있으리요?​ 하고 믿지 아니하였다. 이들을 두고 성경은 무어라 말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입으로 그분께 아첨하며 자기들의 혀로 그분께 거짓말을 하였으니 37 이는 그들의 마음이 그분께 대하여 바르지 못하고 그들이 그분의 언약 안에서 확고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시 78: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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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때에 사람들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살도록 지시한 말씀을 믿지 못하여 거부하고 이집트로 도망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언제나 이런 자들은 있어 왔다. 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는 주님을 버리고 그분을 팔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오늘날 사람들 중 이런 사람들을 보고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요한은 이들을 두고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분명히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나간 것은 그들이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롭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나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그리스도를 택하기보다 로마를 택하고 구속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로마의 만들어진 성직자제도를 신뢰하였다. 이런 이단들은 곧 교회 안으로 들어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마져” 배신하고 온갖 악한 것들을 말할 것이다. 그들은 유익과 편안함을 위해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자들로 처음부터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에 대해 올바르지 못하고 그분의 언약에서 확고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필요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성문을 달고자 할 때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나아가 그들을 도울 것처럼 말하던 “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족속인 종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같다. 이들은 느헤미야가 거절하자 돌이켜 온갖 악한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중단시켰던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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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처음에 주를 구하던 것을 그치고 섬김에서 열정을 보이다가 맹렬히 식으며 경배에서 돌이켜 더 이상 주의 길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며 미지근해지고 관심을 갖지 아니하며 그러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들의 열심은 사라지고 외적 경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의 생각에서 조차도 주님에 대한 것을 거부하며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는 주의 길들 알기를 원치 아니하나이다.”(욥 21:​14)라고 말한다. 그들은 공개적인 죄들로 나아가며 하나님과 관련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끊어버리며 어떤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의 결과를 거둘 뿐 아니라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긴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는 잠언의 말씀을 이루며 “ 그들이 의의 길을 안 뒤에 자기들에게 전달된 거룩한 명령에서 돌아서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더 나았으리라.”는 말씀을 이루게 될 것이다(벧후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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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를 버리는 모든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누리며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천국은 오직 이 땅에서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하지 아니하며 모든 불법과 불의에 대해서 분명하게 행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자들에 대해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그를 감싸고 과거의 죄들이 그들을 찾아낼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으나 그에게 어떤 통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눅 16:23) 자신의 처지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여전히 통보를 받지 못하는 자신의 형제들이었다. 비록 이 땅에서 자신의 양심을 화인 맞은 채로 살아간다 하여도 그 때가 되면 그의 양심은 살아나게 될 것이며 부끄러움과 치욕이 그 안에서 매우 강하게 역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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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를 버리는 자들의 이름은 “땅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도 또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땅에 기록된 이름은 오래 가지 못한다. 땅에다 이름을 쓰면 그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사라지는 글씨가 될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땅에 있으며 그것 역시 영원하지 못하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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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 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주목하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너희에게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19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또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만드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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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주를 버린 자들은 “생명의 샘”이신 주를 버린 것이다. 그들은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보자. “누구든지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누구든지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줄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 4:13-14)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 혼에 깊은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오는 생명이 되시는 성령을 우리 안에 주셨다. 이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며 그분의 뜻과 목적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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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하나님께 오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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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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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어떻게 나아가는가?​ 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나아오는 자들이다. 예레미야를 생각해보라. 그에게는 그를 도울 자가 없는 상황이었다. 최상의 사람들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핍박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뿐이었으며 그분 안에서 성소를 찾았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았다. ​ 그러한 가운데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믿음의 간구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17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주] 곧 [전능자]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고후 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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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를 깨닫는 자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으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마련하실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일을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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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자이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여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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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입술로 그분을 인정하는 자이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그분을 인정하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라.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초장의 백성이며 그분의 손의 양들이로다.”(시 95:7) “멀리 있는 자들아, 너희는 내가 행한 것을 들을지어다. 가까이 있는 자들아, 너희는 내 능력을 인정할지어다.”(사 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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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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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성소는 아주 멀리 있지 아니하다.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느니라,​”(롬 10:8)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 6:21)
렘17.12-14.txt · 마지막 수정: 2018-01-28 15:49 작성자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