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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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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6.6-13 [2017-06-20 09:0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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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4월 13일 주일오전설교==
  
 +======경배의 삶과 허비의 삶======
 +
 +본문말씀:​ 마태복음 26장 6-13절
 +
 +=====서론=====
 +
 +유대인의 달력은 우리가 쓰고 있는 태양력과 다른 달을 중심으로 한 달력을 사용한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붙잡히셨는지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데 유대인의 달력으로 유월절이 니산월 14일에 있다. 원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에서 건지실 때가 아빕월이었는데 아빕월 14일에 유월절을 명령하셨다. 또 그 달 즉 아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을 것을 명령하였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가 된 이후로 달의 이름들을 바빌론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아빕월을 “니산월”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또한 아빕월 혹은 니산월이 첫달이 되어야 하나 7월인 티슈리월을 한해의 첫달로 두고 있다.
 +
 +어찌하든지 간데 니산월 14일이 유월절이 있던 날인데 우리 달력으로 하면 올해 2014년에는 4월 15일에 해당한다. 즉 화요일이 유대인의 유월절인 셈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였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날에 기념하였다고 한다. 반면 로마에 있던 교회는 유월절 지나 처음으로 오는 주일을 부활절로 기념하였다. 따라서 두 교회 간에 부활절날짜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154년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던 폴리캅은 로마 교회의 Anicetus 감독과 상의하여 “서로가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서로를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
 +
 +예루살렘 교회의 방식대로 유대인의 유월절에 부활절을 기념하였다면 4월 15일이 부활절이 될 것이고 만일 로마 교회의 방식대로라면 다음 주가 부활절이 될 것이다. 오늘날 여러 교회들에서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는 방식은 이와 다른데 그것은 325년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결정한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 방식은 춘분 후 보름달 지나 첫 일요일에 지키는 것으로 만일 유월절이 일요일과 겹치면 다음 일요일이 부활절이 되도록 한 것이다. 올해는 4월 20일로 예전 로마 교회에서 하던 방식과 동일한 날짜에 이른다. 이것은 오늘 설교와는 상관이 없지만 교회에서 부활절을 기념하는 날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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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주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갈보리를 향한 여정의 막바지에 이르셨다. 주님의 죽으심을 앞두고 성경은 우리에게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3-5절에 나온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원수들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서로 모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교묘히 붙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백성들 가운데 소동을 염려하여 명절날은 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넘긴 때는 유월절 어린양을 잡던 때였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전에 죽으셨음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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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9:31 그런즉 그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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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구절을 들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잡히시고 토요일이 안식일이고 그 다음 주일에 부활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은 수요일 저녁에 잡히셨다. 그리고 그 목요일 아침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목요일 저녁부터 큰 안식일이 있다. (유대인의 하루의 시작은 저녁부터이다.) 이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니라 무교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큰 안식일이 있는 날로 집회로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요 19:​31에서는 그 날을 큰 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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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23:6-8 같은 달 십오일은 {주}를 위한 무교절이니 너희는 반드시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7 첫째 날에는 너희가 거룩한 집회로 모이고 그 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8 너희는 이레 동안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거룩한 집회로 모이고 그 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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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요나가 고래 배속에서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 있었듯이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낮까지가 꼬박 삼일이 되며 그 뒤 주(週)의 첫째 날인 일요일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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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 그분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고 6-13절을 보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우리는 대표로 한 여인을 보고자 한다. 주님은 그 여인을 두고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이 일 곧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리라.”(마 26:​13)라고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그녀를 기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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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14-16절에 나오는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사도로 세워졌으나 예수님을 판 자가 되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 그 중에서 마태복음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아니한 한 여인과 가룟 유다의 삶을 통해 경배의 삶과 허비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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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경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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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3절까지를 보면 한 여인에 대해 보게 된다. 그 여인은 주님의 죽으심을 앞두고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이름이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당시 주님께서 계시던 장소는 베다니의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동일한 베다니에서 계시고 어떤 집에 계시는데 나사로는 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었으며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장면을 설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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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2:1-3 그 뒤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셨는데 거기에는 이미 죽었던 나사로 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자가 있더라. 2 거기서 그들이 그분을 위해 저녁 식사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섬기고 나사로는 그분과 함께 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더라. 3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이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건인가?​ 많은 주석가들이 두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보고 있다. 마태복음의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요한복음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을 본다. 마태복음에서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를 책망하는 것은 가룟 유다이다. 장소는 둘 다 베다니이고 마태복음에서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으로 소상히 기록한 반면 요한복음에는 명확히 어디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나사로가 있고 마르다가 섬기고 있었던 점을 본다면 나사로의 집일 가능성이 더 크다. 가장 큰 차이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마태복음 26:2에서 당시의 사건은 유월절 이틀 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월절 엿새전이다. 물론 마태복음 자체가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가복음 14장에서도 동일하게 유월절 이틀 전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두 사건이 처음부터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같은 사건이라면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기념하라고 한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가 될 것이며 만일 같지 않다면 주님은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주님은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경배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사건을 두 가지 각도 모두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두 여인들의 모습에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요 11:2을 보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할 때에 “그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던 자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다고 하는데 11장에서는 주님께 부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같은 사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판단하여 최선의 해석을 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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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마태복음의 여인을 보자. 그 여인은 주님께서 계신 곳을 찾아왔다. 분명 이 여인은 주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분께 경배하러 온 것이다. 이 여인이 주님께 드리고자 가지고 온 것은 향유였다. 마가복음 14:3은 “매우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깨뜨리지 않으면 향유를 쏟을 수 없다. 그녀는 주님께 그 귀한 향유를 드리기 위해 그 옥합을 깨뜨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경배는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여러분의 마음이든지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최선의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깨짐”이 요구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고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 경배하러 모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 그 어떤 것에도 그 시간을 드리지 않고 주님께만 그 시간을 드리고자 하는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주일의 맨 처음을 주님께 드리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어떤 부분에서도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고후 8장을 보면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고난의 큰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서도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랐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에서 십일조를 드리네 마네 하는 것들을 본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인 십일조를 주님께서 명령하셨던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는다. 십일조가 되었든 혹 그 얼마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내가 드림으로써 경배하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들을 희생함이 요구된다. 교제를 위해서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주님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요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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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우리는 귀한 옥합을 깨뜨릴 마음이 있는가? 만일 그 옥합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두 가지 결과를 볼 것이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신다. 마태복음 26:10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란 표현을 볼 수 있다. 여기 “아시고”는 영어로 “understood”이다. 즉 주님께서 이해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이 여인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두고 분개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해하시고 오히려 여인을 칭찬하였다. 요한복음 12:​3에서는 “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린다면 그것은 온 집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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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을 두고 “나를 장사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을 계시하신 이후로 종종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큰 자가 누구인지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고 믿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주님께서 “그녀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나를 장사지내기 위함이니라.”(마 26:​12)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예언적으로 말씀한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왜 이 여인의 행동을 두고 이 여인을 기념할 것을 명령하셨는지 생각해보라. 주님은 항상 사람들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칭찬하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여인의 단순히 그 행동만을 보고 칭찬하셨겠는가?​ 분명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이 여인이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계시하셨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대비해서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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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만일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사건이 서로 다른 것이라면 이 여인이 주님께 향유를 붓기 전 사흘 전에 마리아가 주님의 발을 향유로 씻기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행동에서 그녀의 경배의 삶에 대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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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2:3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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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마르다와 나사로의 여동생인 이 마리아가 나오는 곳은 총 세 군데뿐이다. 누가복음 10:39-42과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녀가 언제나 예수님의 발치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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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10:39 그녀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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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1:32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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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2:3 그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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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자기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었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도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그분을 경배하였으며,​ 이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았다. 마리아는 진정 영적인 여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알았다. 그녀는 그곳이 축복의 장소임을 알았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겸손하였고 그분을 사랑하였으며 그분을 믿었고 또한 자신의 것을 드릴 만큼 헌신적이었다. 또한 그녀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던 것을 깊이 생각해보라. 여인의 머리털은 그녀의 영광(고전 11:​15)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영광으로 주님의 발을 닦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영광을 내려놓았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경배는 나의 영광을 내려놓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잘못된 경배는 내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이다. 종종 주님을 경배하려 모인 이곳에서 자신을 높이려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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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마태복음의 여인이 마리아라면 나는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일으키신 후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라 믿는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하셨던 것을 안다. 분명히 마리아는 언니인 마르다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누누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향유를 준비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예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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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두 여인이 동일한 여인이 아니어도,​ 우리는 이 두 여인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주님께 향유를 부었고 두 여인 모두 십자가 이후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게 하려고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무리 안에 없는 것을 본다. 두 여인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였다면 그들은 슬픔으로 무덤에까지 갔을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계시는 것과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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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허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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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여인과 반대로 주님 앞에서 허비된 인생을 산 한 사람의 기록이 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4) 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흘 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분개하며 그 여인에게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 9 이 향유를 비싸게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9) 라고 하였다. 여기서 “허비”라는 단어에 유의해서 보라. 이 단어의 그리스어는 아폴레이아(ἀπώλεια)란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 17:12에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멸망의 아들”이라 지칭하셨는데 멸망이란 단어의 그리스어가 동일한 “아폴레이아”이다. 이 단어는 “허비”와 “멸망”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멸망에 속한 아들일 뿐더러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허비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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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룟 유다는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그리고 열 두 사도 중 하나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분명 그는 예수님을 삼년 반동안 따라다니며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배웠으며 그분의 사역을 함께 했다. 예수님께서 악한 영들을 제어하는 사도들에게 주셨을 때 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룟 즉 케리옷 혹은 그리옷 지방 출신의 사람으로 예수님과 같이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것이 그의 악한 것을 보고 그를 선택하신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주님은 그를 포함한 열 두 사도들을 선택하시기 전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 가룟 유다가 당시 종교나 정치 사회적 희생양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가룟 유다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잘못된 추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신다는 점이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으며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있는 의지적 선택을 존중하신다. 분명 가룟 유다를 두고 성경은 미리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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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41:9 참으로 내가 신뢰한 나의 친한 친구 곧 내 빵을 먹은 자가 자기 발꿈치를 들어 나를 대적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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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55:12-14 나를 모욕한 자가 원수가 아니었으니 원수였더라면 내가 참을 수 있었으리로다. 나를 향하여 자기를 높인 자가 나를 미워한 자가 아니었으니 나를 미워한 자였더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로다. 13 오직 그것은 곧 너니 나와 동등한 자요, 나의 안내자요,​ 내가 아는 자로다. 14 우리가 서로 다정히 의논하고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으로 걸어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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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것은 파라오를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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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9:15-18 그분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나니 16 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 17 성경 기록이 파라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너를 일으켰나니 이것은 내가 네 안에서 내 권능을 보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밝히 알리려 함이니라,​ 하시나니 18 그런즉 그분께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또 강퍅하게 할 자를 친히 강퍅하게 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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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끝마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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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9:22-23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기 위해 파멸시키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 23 이로써 영광에 이르도록 자신이 미리 예비한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 하셨을진대 무슨 말을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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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파멸시키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이 누구인지 미리 아신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 대하여 심히 오래 참으로심으로 인내하신다. 즉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적 선택으로 인한 것이다. 즉 그 모든 부분에 있어 가룟 유다 개인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의 책임이 없다면 그는 단순히 배반자에 대해 언급된 대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희생된 자가 될 것이다. 주님은 가룟 유다를 두고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여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마 26:24).
 +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회개할 기회나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지 않았는가?​ 아니다. 주님은 충분히 그러한 시간들을 주셨다. 심지어 그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알려주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도 가룟 유다는 자기의 악한 마음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처음 그가 주님으로부터 선택 받았을 때에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또한 주님의 권능을 함께 했으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마음에는 악한 마음이 들어간 것이다. 어쩌면 주님께서 정치적으로 자신이 세워지는 것을 피하시고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에 그는 돈에 대한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제자들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가룟 유다가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마리아에게 말하였을 때에도 그는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위하여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도둑이므로 가방을 맡아 그 안에 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그의 진실된 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를 잘 알지 못하던 제자들은 그가 진실하고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평가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은 전혀 영적이지 못하였다. 그의 판단은 주님을 경배하러 온 여인에 대해 오판하게 만들었다. 그는 육신을 따라 걷고 말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하게 시작하였으나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이미 씻긴 자는 모든 곳이 깨끗하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가룟 유다가 깨끗함을 얻지 못한 자임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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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예수님을 얼마에 팔았는가?​ 은 삼십냥에 팔았다. 그것은 어쩌면 성전 세겔로 삼십 세겔의 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을 때 그는 삼백 데나리온의 비싼 것을 팔아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뭐라했다. 삼백 데나리온이란 삼백일을 일하여 번 돈을 말한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의 품삯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백 데나리온은 일년치의 봉급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보다 못한 가격에 배반해버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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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악한 마음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보라.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제자들이 한 여인에게 했던 말과 같다. 제자들은 가룟 유다에게서 영적으로 악한 것을 배운 것이다. 그는, 주님을 경배하는 여인을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사탄이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였는가?​ 요 13:2을 보면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그분을 배반하여 넘겨줄 생각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것을 붙들었다. 그 뒤 요 13:27에서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그의 생각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장악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탄에게 그의 도구로 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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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했던 여인들을 이해하지 못한 가룟 유다나 주의 제자들과 같이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판하고 오해할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을 때 가룟 유다는 비싼 것을 허비한다고 말하였으며,​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경청하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말하여 언니를 도와 음식 장만하는 일을 하도록 요청하였다. 주님은 그녀의 요청에 대해 마리아가 이미 좋은 부분을 차지했으며 그것을 절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마리아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러 나갈 때 사람들은 그녀가 무덤으로 가서 슬픔으로 곡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앞에 엎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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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룟 유다는 주님 앞에서 허비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았으나 그것은 허비되었다. 그의 삶은 경배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먼저 그는 주님을 믿음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있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주님에 대해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는 주님과 삼년 반을 같이 있었으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였으나 멸망의 아들 즉 멸망에 속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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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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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교제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 앞에서 허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마26.6-13.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