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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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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3 [2017-10-15 15:46]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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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15일 주일오전설교==
  
 +==크리스천의 가이드라인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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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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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말씀: 마태복음 5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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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5:3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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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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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이사야 시리즈를 내려놓고 마태복음에서 흔히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부분에서 일부를 보고자 한다. 마 5장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주신 말씀이 담겨 있다. 혹자는 마태복음 5장을 하늘의 왕국의 시민들의 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마태복음 5장 1-12절은 “팔복”이라 불린다. 그 이유는 여덟 개의 “복이 있나니”가 있기 때문인데 “복”이라는 단어는 아시아권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복(福)이라는 단어를 보면 하나님(神)과 한(一) 사람(口)이 에덴동산(田)에 있을 때 행복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물질적인 복을 원하는 반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그와 같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외적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내적 행복”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복”은 우리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종류의 복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늘날 여러 기독교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르치면서 세상적인 관점의 물질적인 복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점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팔복”을 가르치면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 즉 크리스천의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점이다. 참 크리스천이라면 빌립보서 2:5에서 말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도 있던 생각”을 지니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의 자세는 크리스천의 영적 성장이 어떠함을 보여준다. 영적인 면에서 생각을 해 볼 때 우리가 삶을 두고 어떤 태도를 갖는가 즉 어떤 생각을 따라 살고 있는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또한 말씀에서 오는 우리의 확신이 더욱 열정적이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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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차이는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 삶의 자세가 어떠한지에 따라 인생의 가는 행로가 달라진다. 삶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매우 좋은 환경에서도 자신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찾으려 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으로 인해 행복을 즐길 이유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주님은 그 부분에서 “팔복”을 통해 가르치고 계신다. 이 팔복은 왕국의 자녀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것으로 팔복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음을 본다.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다음 마지막 네 가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의 패턴과 비슷하다. 십계명을 보면 처음 네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다섯 째 명령부터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어졌다. 이 팔복은 영어로는 “Blessed”로 시작하고 우리말로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각 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여덟 가지 자세를 지닌 자들이 복이 있음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 중에서 오늘은 3절에 집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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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의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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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복”이라는 단어를 보자. 그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행복”(happy) 혹은 “운이 좋은”이다. 우리말로는 “행복”하면 또 다시 이 “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다. “복”으로 번역된 그리스 원어는 가끔 “행복”(happy)이란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즉 “복”이라는 단어는 “만족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대할 때 자신과 관련된 일들이 잘 풀려나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가령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복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복”의 의미와 거리가 먼 것을 문장을 잘 읽어본다면 깨달을 것이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 사용된 “복이 있나니”에 사용된 그리스 원어를 보면 “마카리오스”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는 그것은 언제나 물질적인 축복과 전혀 관련되지 않았으며 성경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아도 물질적인 복과 관계가 없고 마음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 만족을 갖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는 것과 같다. 맥스 루카도는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찬사(박수)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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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점에서 팔복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이와 같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궁핍한 자(영이 가난한 자)인 것을 인지한다. 그 궁핍은 영적인 필요가 내게 있음을 뜻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자신을 두고 만족해했던 것을 회개(애통)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모든 권위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내 삶의 주관을 하나님께 맡긴다(온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감사하면서 더욱 그분에 대해 알고자 하는 심정으로 가득해진다(주리고 목마른). 우리가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닮아간다. 그분께서 우리에 대해 긍휼을 베푸셨던 것처럼 우리도 남을 용서한다(긍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점검하며 변화해 가고(마음이 순수)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한다(화평케 하는 자). 우리는 부당함을 견딤으로써(핍박) 하늘의 찬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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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이 “팔복”이 크리스천이 균형 잡힌 건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마땅히 가져야할 필수적인 요소들이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팔복의 자세로 살며 그것들이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서 보이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속에서 이 팔복의 축복이 있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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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 가난한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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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부터 보자.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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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복은 “영이 가난한 자들”에게 있는데 과연 영이 가난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난”이라는 단어에 집중해보자. 가난은 삶에 필요한 무언가가 결핍되거나 부족한 것을 뜻한다. “가난한 자”(poor)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부한 사람들을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진 나머지 자신을 가난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삶의 필수 요소들이 심각하게 결핍된 자들을 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무언가를 베풀었을 때 그들은 다시 여러분에게 되갚아 줄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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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19: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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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26:9-11 이 향유를 비싸게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그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 여자는 내게 선한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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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자로 번역된 이 단어는 “거지”(begger,​ 눅 16장의 나사로)로 번역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 구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준다. 거지란 한 손으로는 삶에 필요한 것을 얻고자 구걸을 하고 한 손으로는 수치로 인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자이다. 많은 거지들과 가난한 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경멸의 대상이 되곤 한다. 가난한 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삶의 필요한 것들을 얻지 못하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손길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주님은 이 가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영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는 영적으로 필요한 무언가가 결핍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필요에 대해 심각하고도 절대적으로 결핍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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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이 “영으로 가난한”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여러분이 영적으로 얼마나 결핍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내 자신 안에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길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에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즉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이래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심각한 영적 결핍 가운데 놓여 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말기 상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의학의 힘을 빌어 자신의 몸의 보이지 아니하는 부분에 대한 정밀 검사를 통해 알게 되듯이 우리는 스스로 영적인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며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한 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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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그들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검증하여 그들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입증하였느니라. 10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12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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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우리가 영이 가난한 자가 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내적 갈등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로 가득해 있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결핍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아는 너무 자신으로 높아진 마음으로 가득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겸손히 낮추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 조차 생각하지 못하지만 설령 그러한다 하여도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그분의 축복을 받을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으로 바라볼 때 사람은 영적으로 눈멀어 있으며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어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이 필요한 상태이기에 어느 누구도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분의 호의를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소망이 없으며 무기력한 상태이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실제로 깨닫기 전까지 그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높아져 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결핍을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영적으로 자신을 구원할 아무 능력이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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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반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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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함을 말하는가?​ 먼저 하나님이 필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분의 왕국에 들어가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첫 번째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자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하여 절대적으로 그분이 필요한 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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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므로 그분께 무언가를 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호의를 얻거나 죄들의 용서를 얻고자 우리 스스로 그분께 행하거나 드릴 수 있는 영적 능력이 결핍된 자들이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는 자임을 인정하고 영적인 필요를 위해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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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2: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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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내적 필요를 충족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은 우리의 보이지 아니하는 혼에 이르지 못한다. 가령 누군가가 배고플 때 그는 음식이 필요한 것이지 은혜에 대한 강좌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몸이 다쳤을 때 의학적인 필요가 주어져야지 도덕적인 조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필요에 대해 물질적인 것으로 충족할 수 없다. 어떤 물질적인 번영도 죄 안에서 죽은 영을 되살릴 수 없다. 성사나 고행을 통해 자신의 죄들을 용서받으려 하는 시도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다. 영이 가난한 것은 우리 혼이 무기력한 상태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파산 상태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정죄 받은 채 서 있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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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영이 가난하다는 말이 가르치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주님은 이와 관련된 비유를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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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 18:9-14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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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은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이 행한 여러 가지 것들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높아진 마음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즉 구원을 위한 첫 관문은 비유의 세리처럼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죄인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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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소식은 우리가 정죄 받은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방안을 제공하셨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주께로 돌아서고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주님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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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께서 바로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나타났다. 여러분은 그 전부를 다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필요를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두는 것이 요구된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그분을 신뢰함으로서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한 손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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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은 할아버지가 밤에 손녀의 방을 지나가다가 손녀가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알파벳을 반복하는 것을 들었다. “뭐하고 있니?” 할아버지가 물었다. 손녀는 대답하였다. “기도하고 있어요. 무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알파벳의 모든 단어를 나열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최선의 기도로 합쳐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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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행하신 모든 구원계획을 신뢰하고자 합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주님의 큰 긍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나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음을 제가 받아들입니다.”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이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빌 1:6) 성경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움을 어떻게 말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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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3:20-26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22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26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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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부한 젊은 관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였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 그는 선한 일에 대한 리스트를 주님으로부터 얻고자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모든 명령들 중 지키지 못한 것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였기에 주님께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라고 묻기도 하였다. 주님은 그의 마음에 있는 재물에 대한 탐심을 보이기 위해 최종적으로 그의 소유에 대한 언급을 하시고 그 뒤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어떤 성사나 의식이나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전적으로 그분께 우리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화학 공식을 조금 알고 있으니까 화학자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의 앞에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젊은 관원과 같이 사도 바울 역시 자랑할 만한 것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민족인 히브리인 이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며 초대 이스라엘 왕을 배출하였던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고 그 이름을 따 원래의 이름이 사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 따르면 사람들 앞에서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는 율법이 사람의 마음에 대한 명령까지 주신 것에 주목하였다.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그는 십계명의 열 번째 명령인 “너는 탐내지 말라”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가 한 일은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지기를 원한 것이었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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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의의 기준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제공하는 단 한 길을 마련하셨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오고자 한다면 다른 누군가나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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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반응 -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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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와싱톤 기념관에 대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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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소년이 와싱톤 기념관에 갔으며 거기서 서 있는 수위를 보았다. 그 소년은 수위에게 기념관을 사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수위는 몸을 굽히고 앉아서 물었다. “얼마 있는데?​”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25센트를 꺼냈다. 수위는 말했다. “그거로는 안 돼.” 그러자 소년이 말한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어요.” 그러고는 9센트를 더 꺼내었다. 수위는 소년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애야, 너는 세 가지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먼저 34센트로는 충분하지 못해. 삼천사백불이 되어도 기념관을 살 수 없어. 두 번째로 와싱톤 기념관은 파는 물건이 아니야. 그리고 세 번째로 네가 미국시민이면 이 기념관은 이미 네 거야.” ​
 +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죄들의 용서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은혜와 용서는 파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미 용서를 얻었다.
 +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되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고 11 그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12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13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0-13)
 +
 +이 구절은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를 말한다. “받아들이라,​ 믿으라, 되라.”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바를 믿어야 하며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의 삶속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주님은 상산수훈이라는 자신의 위대한 설교를 영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열쇠를 가지고 시작하셨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겸손히 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하늘의 왕국을 상속받을 것을 말한다.
 +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직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면 그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성경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음 날이 어떤 날이 될지 모른다. ​
 +
 +한번은 여러 형제들과 함께 전도지를 돌릴 때였다. 한 형제가 두 여자들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였는데 두 여자는 “우리는 지옥갈꺼예요.”라고 말한 후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간 쯤 왔을 때 한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두 여자를 받아버렸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하며 자랑할 수 없다.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약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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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설교를 듣게 된 것을 우연으로 생각하지 말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목적으로 오게 되었음을 받아들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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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이천 년 전에 그 오래되고 낡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시고자 그분의 팔을 벌리고 여러분을 맞이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용서를 제공하셨기에 만일 여러분이 용서를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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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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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0년 경 죠지 윌슨(George Wilson)이라는 사람이 편지를 훔치다가 정부 관리에게 걸렸는데 그 사람을 살해한 죄로 잡혔다. 그는 심판을 받았고 교수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잭슨 대통령은 그를 사면하는 서신을 보내었다. 하지만 윌슨은 희한한 일을 했다. 그는 사면을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 사건이 대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거기서 대법원장인 마샬은 자신의 판결을 달았다. 그 판결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면이란 종이 한 장이지만 그 가치는 사면 받을 자의 용인에 달려 있다. 만일 그것이 거부된다면 그것은 사면이 될 수 없다. 죠지 윌슨은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 죠지 윌슨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를 제공하셨어도 그 용서는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 효력이 미칠 것이다.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그 용서는 어떤 혜택도 은혜도 제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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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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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이 가난한가?​ 아니면 자기 의로 가득한가?​ 구원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자신의 영적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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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설교 시리즈가 있어 그것에 살을 더했습니다.)//​
마5.3.txt · 마지막 수정: 2017-10-15 15:46 작성자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