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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12-16
2017년 4월 16일 주일오전설교
크리스천의 생각 - 8

경주를 달리는 크리스천의 다섯 가지 원칙

본문 말씀: 빌립보서 3장 12-16절

빌 3:12-16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15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에서는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할지니라.

서론

오늘은 4월 16일로 부활절이자 2014년 4월 16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되는 날이다.

3장 12-16절을 보기 앞서, 빌립보서는 전체적으로 “크리스천의 생각”이라는 주제로 나아가고 있으며 또한 각 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하자면:

1장은 단일한 생각에 대해 말한다.
2장은 자신을 낮추는 생각에 대해 말한다.
3장은 영적인 생각에 대해 말한다.
4장은 보호받는 생각에 대해 말한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갈망한다. 삶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의 영적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 마치 우리가 아이로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장에도 여러 굴곡들이 존재한다. 오늘 우리가 볼 빌립보서 3장은 전체적으로 영적인 생각에 대해 말하는데 특히 12-16절에는 사도 바울이 위대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비결이 적혀 있다.

사도 바울은 종종 크리스천의 삶의 진리를 당시 사람들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가져와 설명하곤 하였다. 크리스천의 영적 전쟁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을 보면 당시 로마의 군사들이 입는 전신갑옷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교회가 마치 건물에서 보는 것처럼 같이 성장하고 세워져 간다는 것을 설명할 때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가 많은 토목 건축물들 및 신전들을 갖고 있음을 이용했을 것이다. 농업 사회가 주를 이루던 당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란 영적 진리를 설명하였다. 로마는 갖가지 운동시합들이 있었으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용해서 크리스천의 삶의 진리들을 설명하였다. 고린도전서 9장은 대표적인 부분인데 달리기와 권투와 같은 운동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고전 9:24-27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빌 3:12-16을 보면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을 경주를 달리는 운동선수에 비유하고 있다. 그 비유를 통해 사도는 우리에게 경주에 임한 자로서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크게 다섯 가지를 요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I.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함(빌 3:12-13)

빌 3:12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노라.
빌 3: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위대한 사도라 불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성취한 것들을 가지고 만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웠고 복음전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많은 영적 진리들과 하늘의 계시들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운동선수가 자신의 최고 점수에 만족하지 않듯이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들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사도 바울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이지 그가 비교로 삼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비교로 하여 아직 자신이 멀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주 예수님으로 인해 만족해하며 그분을 더 알고자 했지만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아니하는 태도가 사실 크리스천이 경주에 있어 계속 달리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만일 운동선수가 자신의 점수에 만족한다면 그는 더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실력이 후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운동선수는 현재의 자신의 최고의 점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더욱 더 주님을 알기 원했고 더 그분을 닮기 원했으며 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려 그분으로부터 더 많은 상을 바라고 있었다.

두 번째 주의해야 할 부분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비교의 대상으로 다른 크리스천을 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장하지 아니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비교 대상으로 삼아 성장해야할 이유를 잃어버릴 때이다. 최고 기록을 세운 운동선수의 가장 큰 위기는 그 기록을 깰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만족하며 더 이상 훈련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때이다.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운동선수가 자기 뒤에 있는 선수들을 보면서 만족하는 순간 그는 전력을 다해 뛰지 않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미 많은 것들을 이루었고 성취하였으며 또한 영적성숙에 있어서도 누구보다도 최고의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점수를 주고 있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한 후에 그 다음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가장 최고의 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이 아직도 부족하며 성장해야 할 여지가 있는 자임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기를 원했다. 즉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였으며 그 뜻에 따라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현재 자신이 영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들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자신의 삶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나아갔다. 그는 영적으로 이미 많은 것들을 이루었음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보지 않았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렇기 때문에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원래의 모습보다 더 높게 평가하거나 더 낮게 평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생각해야 한다.

롬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각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이 주는 생각과 교만으로 인해 높아지는 마음을 갖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잘못 평가한 경우들에 대한 예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경고를 주고 있다. 구약에서 삼손은 그 예 중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보다 다른 일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델릴라라는 여자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의 힘의 신비를 가르쳐준 후 그 결과로 힘을 잃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에게서 그 힘이 떠나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신약에 와서도 그 경고는 계속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부유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평가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II. 한 가지 일에 전념함(빌 3:13)

빌 3:13 …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

운동선수는 달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직 달리는 그 일에만 전념해야 하며 온 생각을 그 일에 집중한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일”에 자신이 전념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에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을 언급하기도 하며 삶의 방향을 결정하곤 한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에게 있어 한 가지 일은 “평생토록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이었다(시 27:4)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더 알며 그분과 더욱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이었다. 중국 선교사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한 가지 일에 관심을 가졌고 그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린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아셨다. 주님은 섬기는 일로 인해 경황이 없고 바쁘던 마르다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로 인해 화를 내면서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섬기게 내버려 두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런즉 그녀에게 명하사 그녀가 나를 돕게 하소서”라고 하였을 때 이렇게 답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0-42) 마르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을 듣는 데 자신을 더욱 드리는 그 일이 필요하였다. 한 청년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막 10:17)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그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아셨다. 그 청년은 “ 네 길로 가서 네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재물로 인해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한 가지 일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팔방미인이 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일”에 전념할 것을 말한다. 경주에서 이기는 자는 집중해서 눈을 목표에 두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그 일에 투자하면서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는 자이다.

III. 뒤에 있는 것들을 잊음(빌 3:13)

빌 3.13 …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경주하는 사람은 자신이 달리는 방향을 헛갈리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달리다가 일어난 일들이 계속 자기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다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두는 것은 경기에 영향을 끼칠 소지가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듯이 크리스천의 삶의 많은 일들이 그와 같다. 경주를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적합하지 아니하다”(눅 9:62)고 말씀하셨다.

“과거는 잊어버리라.” 이것은 때로 오해를 가져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건이나 일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일이 좋지 않은 기억이라면 과거는 잊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에서 과거를 지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과거를 그냥 잊게 된다면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울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잊으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달리는 선수가 어느 지점에서 땅의 높낮이가 갑자기 변해 넘어질 뻔 하였다면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아 그것이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하지 않으려고 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다시 돌아야 한다면 과거의 그 경험을 토대로 주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잊는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기억하지 아니한다”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부분에서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억에서 그것들을 완전히 없애버리신다는 것인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과 불법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아담이나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들이 이미 성경에 담겨있지 아니한가? 사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의 죄들과 불법들을 아신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그 죄들에 대한 댓가가 지불되었기에 더 이상 그 죄들과 불법들이 우리를 대하시는 일에 있어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 앞에 갖는 지위 역시 전혀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이것이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죄들이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나 의로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주님은 마치 그것을 없었던 것처럼 여기시며 그 죄들이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어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하신다.

따라서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서 과거의 것들을 완전히 지워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삶으로써 과거의 힘이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가 우리의 삶에 안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앞장서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만일 그 일이 그의 마음에 계속 남아 그를 괴롭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기쁨으로 수행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를 통해 배우되 과거가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좋은 예를 구약의 요셉에게서 볼 수 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갔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후 자기 형들을 다시 대면하였을 때 과거의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들을 용서했고 그들의 죄가 그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과거는 우리에게 많은 후회할 것들을 보일 뿐이다. 과거에 살게 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성공에 대해서도 우리는 과거는 과거로 두어야 한다. 과거의 성공에 빠져 있다면 나아가는 일을 소홀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들과 함께 제쳐두어야 한다(떨쳐 버리고-lay aside, 히 12:1).

IV.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감(빌 3:14)

빌 3: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을 “밀고 나아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마라톤을 달리는 운동선수에게 달리는 일은 밀고 나아가는 것과 같다. 달리다보면 어느 때가 되면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고 나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리는 일은 제자리에서 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때로 다리는 삶의 무게로 무거워지고 그냥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앞에 있는 상을 바라보고 결심하여 나아갈 힘을 얻는다.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에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한다. 먼저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지 아니한다면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운동선수도 가만히 앉아서 TV를 보거나 혹은 쇼핑을 하거나 한다면 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보상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약속이다.

약 1:12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관(冠)을 받으리라.

고전 9: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주님께서 상주시기를 바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를 손수건에 싸서 보관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장사하라”.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두 번째 주의사항은 밀고 나아가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반드시 이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모든 것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 힘으로만 크리스천의 경주를 하는 자들은 쉽게 지쳐버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라고 하셨다. 빌 2:12-13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부분과 우리가 드러내는 부분이 존재한다.

세 번째 주의사항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가? 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주님께서 그를 부르셨던 모든 일에서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더 높은 이유들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달리는 자는 어떤 목적을 갖지 않은 채 혹은 상에 대한 욕심이 없이 달리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전 9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고전 9:27)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원받기 위해 달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달리고 있을 뿐이다. 이 경주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 목적과 뜻에 따라 합당하게 걸었는지 혹은 경주에 참여했는지를 볼 것이다. 구원은 “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이며 “선물”이다.

엡 2:8-9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림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목표로 하고 달리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부르셨으며 우리 각자에게 그분의 선하신 계획과 뜻을 두셨다. 그 계획과 뜻을 찾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상을 바라며 크리스천의 경주에서 포기하지 아니하고 인내로 달리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V. 같은 규칙에 따라 걸음(3.15-16)

빌 3:15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
빌 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에서는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할지니라.

경주는 하는 자들에게 상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규칙대로” 행해야 한다. 만일 규칙을 어길시 그는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혹은 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격을 잃거나 상을 잃었다고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 완전한 자들은”이라 말하고 있음을 보라. 그는 이미 영적으로 성숙한 자였으며 16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미 도달한 곳”이 있었다. 하지만 12-13절에서 보았듯이 그 안에 안주하지 않았으며 더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바라고 달렸다. 또한 “같은 규칙에 따라 걷고 같은 것을 생각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우승하려고 애써도 적법하게 애쓰지 아니하면 관을 얻지 못한”(딤후 2:5)다.

1988년 세계 올림픽이 한국에서 열렸다. 그 때 온 국민이 열광의 도가니였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단거리 경주에 참여했던 벤 존슨을 기억하는가? 그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9초 79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3일 후 약물 복욕 사실이 밝혀져 그는 금메달을 박탈당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을 떠나야 했다. 2008년 우사인 볼트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100미터및 200미터 단거리 질주와 4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곧 400미터 계주 금메달을 박탈당하였다. 그 이유는 계주를 달리던 동료선수 중 하나가 도핑 재검사에서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고전 9:25-27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성경을 보면 규칙대로 걷지 아니함으로써 보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의 현 모습보다 더 영적으로 보이길 원하여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였으며(행 5장)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선양 양심을 버림으로써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딤전 1:19).

혹 우리 중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실” 것이라 하였다. 사도 바울은 경기에서 적법하게 같은 규칙에 따라 걷기 위해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고 하였다.

딤전 4:7-9 그러나 속되고 늙은 부녀들의 꾸며 낸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도록 스스로 훈련하라. 8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다가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느니라. 9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규칙은 내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따라 평가하는 자는 심판자이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모두 서서 그분 앞에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해명하고 회계보고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말할 때 심판석은 그리스어로 “베마”가 사용되었다. 베마는 올림픽 심판관들이 상을 주는 자리를 뜻한다.

결론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경주에서 달리는 자들과 같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히 12:1-2)고 권면하고 있다. 경주에 참여한 자로서 우리는 현재의 영적인 상황에 안주하고 있는가? 한 가지에 전념하고 있는가? 혹 과거로 인해 생각이 영향 받고 살지는 않는가? 바라봐야 할 푯대를 놓치지는 않았는가? 규칙에 따라 걷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빌3.12-16.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