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약5.14-18
2013년 4월 28일 주일 오전설교

하나님의 치유

본문말씀: 야고보서 5장 14-18절

서론

한국식 기독교의 특징을 몇 가지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국식 기독교란 전 세계적인 기독교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한다. 오직 한국에서만 실행하는 것들이다.

1. 새벽기도.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님이나 다윗이나 다니엘과 같은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새벽에 즉,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함께 시작했다. 다만 새벽에 기도하려고 집단적으로 교회당으로 모이는 일은 한국식 기독교의 특징이다. 나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앞서 말하지만 기도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다. 유대인들도 동일한 습관을 가졌다. 그들은 회당에 모여 혹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같이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도행전 3:1을 보면 “아홉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올라갔”다. 또한 사도행전 16:13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사람들이 늘 기도 드리는 강가”로 나아갔다. 다만 그들은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몇몇 교회들에서 시행하는 통성기도는 한국식이다. 주님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통성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통성기도는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 6:5-8)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이 되셨으나 제자들을 강요해서 기도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따로 앉아 있으라 하고 그들에게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나오셔서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 하고 또 그들과도 떨어져서 혼자 기도하셨다. 종종 주님은 밤을 새서 기도하시거나 혹은 새벽에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도는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1. 두 번째 특징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좋으나 문제는 “무의미한 반복”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마치 사람들은 절이나 혹 기타 종교에서 자기들이 무의미하게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의식을 망각하게 하는 방법을 따라하고 있다.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기타 종교나 신비술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명상”이나 “반복적인 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한 영들에게 자기들의 의지를 제어하도록 내어준다. 이 방법은 마술에서 상대방을 최면에 빠지게 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이 깨어있기 보다는 멍한 상태가 되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있으라”, “정신을 차리라”고 하셨다. 문제는 이 방법을 교회에서 취하여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나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물들어 있다.

이 방법이 사용되는 흔한 경우는 “귀신들을 쫒는다”고 하는 행위에서 크게 드러난다. 은사주의 교회에서 귀신들을 쫒는다고 하는 방법을 보면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 상태가 되도록 찬양을 크게 오랫동안 한다. 반복적인 찬양은 사람의 생각이 경직되게 한다. 즉, 깊은 생각이나 사고를 하지 않고 감정적이 되게 한다. 그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일어서게 한 후 오직 “예수님의 피”만 생각하라고 하면서 생각을 비우도록 한다. 그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들아 나가라.”고 외친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악한 영들을 쫒아낸 경우가 없으며 또한 악한 영들을 쫒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모든 경우를 찾아보면 성경은 “사도들의 표적”으로써 행해졌음을 분명히 한다. 뿐만 아니라 귀신은 죽은 자들의 넋이나 영이 아니라 “악한 영들”일 뿐이다. 주님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이미 밝혔다. 그런데 “귀신 쫒는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악한 영들의 속임을 받는다.

또한 “사도신경”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에도 장로교회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사도신경의 목적은 중세 카톨릭이 사람들의 손에서 성경을 앗아간 후 그들에게 최소한의 교리를 믿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도신경의 내용 역시 비성경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그 내용 중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카톨릭 교회(천주교)의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행위로 인한 구원을 가르친다. 그들은 사람이 악한 일이 더 많으면 지옥에 가고 선한 삶을 살았으면 천국에 가나 어정쩡한 사람들은 중간 단계인 연옥에서 징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거나 그들을 대신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이 거기서 나와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중세 카톨릭은 성당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연옥과 면죄부까지 만들어냈다. 성경은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곳은 지옥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곳은 하늘나라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 즉, 우리의 선한 삶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하신 대속적 속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 또한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에서 거룩한 공회는 “카톨릭 교회”를 말한다. 영어로 보면 “I believe in the Holy Catholic Church”로 되어있다. 그런데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나온 장로교회가 여전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것이다.

  1. 세 번째 특징은 “기도원”을 운영한다. 기도원의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것이 보편적 관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은 예전부터 샤머니즘의 영향 가운데 있었다. 대체적으로 마을에는 큰 나무가 있고 무당이 굿을 하며 사람들은 그곳에 나아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존재들 즉, 신들이라 불리는 마귀들에게 빌곤 하였다(고전 10:20). 이것은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그곳 원주민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며 기도하던 장소인 “산당”들을 없앨 것을 명령하셨다.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모든 그림과 부어 만든 모든 형상을 멸하고 그들의 모든 산당을 완전히 허물며 53 그 땅의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안에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소유하게 하였느니라.”(민 33:51-53)

주의할 점은 성경에서 “산당”이란 표현이 나오면 무조건 그것이 우상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성막이 머물던 곳 역시 “산당”으로 불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넘어온 후, 모세가 세웠던 성막은 오랜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새로 세워야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성막을 “기브온”에 두고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인 에브라임을 위해 실로에 성막을 세우고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다.

수 18: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함께 모여 거기에 회중의 성막을 세웠더라. 그 땅이 그들 앞에서 정복되었으나

그 뒤에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고 실로의 성막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세운 장막에 두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거처를 두고 “시온”산을 종종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지혜를 얻고자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모세의 성막이 있던 기브온으로 가서 거기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곳 역시 “산당”으로 불렸으며 특히 기브온의 산당은 “큰 산당”으로 불렸다.

대하 1:3 이처럼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에 있던 산당으로 갔으니 이는 [하나님]의 회중의 성막 곧 {주}의 종 모세가 전에 광야에서 만든 것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더라.

왕상 3:4 왕이 기브온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거기로 갔으니 이는 그것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더라.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 개를 드리니라.

이후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성전이 건축이 되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곳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멀리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고 그들 가까이 있는 기브온이나 실로에 세워진 산당에서 희생물을 드렸고 또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민족들의 방법에 따라 높은 곳에 산당들을 세워 거기서 우상을 두고 경배하여 기도하였다.

사람들이 기도원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작심기도를 위한 것 같다. 사실 기도원은 샤머니즘의 영향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또한 병으로부터 치유받기 위해 기도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1. 마지막으로 한국식 기독교의 특징은 “은사주의”계통 교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전파된 이래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교리적인 부분에 많은 이단들을 가져왔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 이단을 가지고 있는 나라, 한국. 왜 이런 결과가 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기복신앙과 샤머니즘의 영향 뿐 아니라 개역성경의 잘못된 번역이 일조하여 잘못된 교리들이 나오게 되었고 또 바른 교리를 가르칠 책들이 많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 내가 의지하는 것은 “원서”이지 “한국 목사들이 저자로 기록한 주석서들”이 아니다. 사실 믿을 만한 주석서가 많지 않다. 또한 샤머니즘이 교회내로 영향을 끼치어 교회는 급속도로 은사주의로 흘러갔다. 현재 은사주의 계통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방언”과 “치유”이다. 방언은 예전에 조금 다룬 적이 있으므로 오늘은 “치유”에 대해 보고자 한다.

치유의 역사

성경을 보면 “치유”의 역사는 구약에도 발견될 정도로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거나 죽은 자들을 살리시곤 하셨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닐까 싶다. 엘리야는 기근의 기간 동안 거처할 곳으로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로 갔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 기근으로 인해 마지막 빵을 만들고 죽으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함께 하셨고 그녀의 가족을 기적적으로 먹이셨다. 비가 다시 오기까지 빵을 만들 가루 통은 고갈되지 않았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았다. 그 뒤 이 여인의 아들이 병들었는데 그 병이 매우 심해 숨이 끓어졌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엘리야는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고 주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를 살리셨다(삼상 17장).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아이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왕하 4장).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이 있었고 그는 엘리사의 소식을 들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요르단 속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단순한 말을 했다. 그 때 나아만은 무어라 했는가? “11 그러나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보라, 나는 그가 분명히 내게로 나아와 서서 {주}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부위를 손으로 쳐서 나병 환자를 회복시킬 줄로 생각하였도다. 12 다마스쿠스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씻으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이에 돌아서서 분노하며 떠나가니”(왕하 5:11-12) 그러나 그가 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씻었을 때 그의 나병이 없어졌다.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에서 건지시거나 병에서 치유하시는 역사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것은 현재 은사주의를 가르치는 교회들에서 가르치는 바와 다르다. 그들은 치유의 은사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치유의 은사란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치유의 은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보도록 하자.

치유 – 메시야의 표적과 사역

가장 먼저 우리가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사람들의 병들을 치유하고 정신병을 고치시고 마귀들을 쫒으시며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일을 권능을 갖고 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바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 일들을 행하셨을까? 그것은 그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주님이 행한 기적들과 이적들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 11:2-6 이제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자기 제자들 중의 두 사람을 보내어 3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니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요한에게 다시 보이되 5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주님은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그것들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곧, 눈먼 자들이 시력을 받으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에서 주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이다.

사 35:4-7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마음을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께서 오셔서 원수를 갚으시리니 곧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리라. 그분께서 오셔서 너희를 구원하시리라, 하라. 5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6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7 또 바싹 마른 땅이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물들의 샘이 되며 용들이 각각 누워 거하던 곳에는 풀이 갈대와 골풀과 함께 있으리라.

사 42:1-7 내가 떠받쳐 주는 나의 종, 내 혼이 기뻐하는 자 곧 나의 선택한 자를 보라.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두었은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판단의 공의를 베풀리라. … 6 나 {주}가 의 안에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붙잡고 너를 지키며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이방인들의 빛으로 주리니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며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오고 어둠 속에 앉은 자들을 감옥 집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61:1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싸매고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결박된 자들에게 감옥에서 놓임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요,

감옥 안에 있는 침례인 요한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침례를 주었던 그분이 메시야의 표적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치유는 메시야의 사역이기도 했다.

마 8:16-17 ¶ 저녁이 되매 그들이 마귀 들린 많은 자들을 그분께 데려오거늘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그 영들을 내쫓으시고 병든 모든 자를 고쳐 주시니 17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

분명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축복을 아직 받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되신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어 더 이상 육체의 고통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으므로 우리가 병을 갖고 있는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오도한다. 그렇지 않다. 아직 그 축복이 임하지 않았을 뿐이다. 에베소서 1:3을 보면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모든 영적인 복”이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의 연장선으로 열두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치유의 권능을 허락하셨다. “그분께서 자기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그들에게 부정한 영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내쫓으며 온갖 종류의 질환과 온갖 종류의 질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이 외에도 주님은 다른 칠십 명도 세우셨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권능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치유의 권능을 행하게 하셨다. “이 일들 뒤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장소로 둘씩 둘씩 자기 얼굴 앞에 보내시니라.”(눅 10:1) “17 ¶ 칠십 명이 기뻐하며 다시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나이다, 하니 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능을 주노니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해칠 것이 전혀 없으리라.”(눅 10:17-19)

그렇다면 이들이 소유한 치유의 권능은 지속적인 것이었는가? 다시 말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치유의 권능을 나누어 줄 수 있었거나 혹은 주님께서 제자들 이후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권능을 허락하셨는가? 불행하게도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다음 우리가 볼 것은 치유의 선물 혹은 은사이다.

치유의 선물(은사) – 사도들의 표적

주 예수님은 대속적 사역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를 지셨고 이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을 믿는 우리의 영적인 병으로부터 건지시고 치유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16:15-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16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로 말하며 18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구절은 은사주의 계통 교회에서 종종 언급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근거로 “치유의 은사”를 강조하며 “병 고침”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구절대로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나으리라”는 말씀대로 오늘날 치유의 기적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치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독이라도 마실 수 있을까? 아니면 독사들을 그냥 집어 올릴 수 있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말하면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이것들은 표적이기 때문이다. 막 16:20을 보자.

막 16:20 그들이 나아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매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증해 주시니라. 아멘.

“따르는 표적들”. 마가복음 16장의 말씀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자. 하나님께서 이 능력을 주신 대상은 그분의 “제자들”이었다. 막 16:14절이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허락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전파한 말씀을 확증하기 위함”에 있다. 제자들이 증거하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바로 그 문제에 있어 그들을 따르는 표적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들이 보이는 기적들과 놀라운 역사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발견된다.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모든 치유의 사건들을 보면 치유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사도”들이었다. 사도들이 아닌 사람들로써 이 치유의 능력을 행한 기록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마가복음 16장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독사에게 물렸으나 어떤 해도 받지 아니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을 병든 자들에게 얹기만 해도 그들은 병에서 치유되었다!

히 2:3-4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 4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과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님]의 선물들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것들이 사도들의 표적임을 확증하였다. “진실로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인내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능한 행위들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하였노라.”(고후 12:12)

그 표적들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사도”로 세움을 얻었으며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치유의 은사는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사도들에게 표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갔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그의 주치의 누가와 같이 다녔으며 또한 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는 위장이 좋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포도즙”을 사용할 것을 권하였을 뿐이었다.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있는 병을 위하여 포도즙을 조금 쓰라.”(딤전 5:23)

치유의 선물(은사)에 대한 신약성경 기록들

그렇다면 치유의 선물(은사)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특히 교회들을 위해 주어진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는 치유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치유의 능력은 사도들과 일련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이미 언급했듯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치유”의 은사 혹은 선물에 대해 언급된 구절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 외 여러분은 바울 서신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먼저 치유의 은사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의 결과이다.

고전 12: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는데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대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선물들과 돕는 것들과 다스리는 것들과 여러 가지 타언어들이니라.

28절은 치유의 은사와 타언어들 즉 방언의 은사에 대해 말하기를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신다. 즉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들이 아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적인 타언어들도 아니고 또한 가르침 역시 성경에서 떠났다.

고전 12:30 모두 병 고치는 선물들을 가지겠느냐?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겠느냐? 모두 통역하겠느냐?

고전 12:29-30의 대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모두 방언을 말하겠는가? “아니오”다. 그런데 은사주의 교회들은 모두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두 병고치는 선물이 있는가? “아니오”다.

로마서 12장 3-8절에는 교회에게 주어진 선물들에 대해 다루나 거기에는 “병 고치는 선물”이나 “타언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허락하시는 일반적인 선물들과 하나님께서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들은 구분해야 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엡 4:11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모두를 사도로 세우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대언자로 세우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복음 전도자로 세우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두를 목사나 교사로 세우셨는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입”이 될 것이다. 팔이나 다리는 어디로 갔는가?

신약에서 치유의 가르침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치유”에 대한 가르침은 완전히 사라졌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더 이상 치유하지 아니하시는가? 아니다. 주님은 구약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백성을 치유하시고 사망에서 건지시며 보호하신다. 오늘 본문말씀으로 취한 야고보서 5장의 말씀이 신약의 치유에 대해 가르친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약 5:14)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병든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첫 번째로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만일 자신의 자녀들이 죄 가운데 거하려 한다면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신다. 우리의 사업을 저주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재산을 날리시기도 하며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게 하시거나 하는 일들이 꼬이게 만드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우리의 몸을 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병들어 아프고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이 병드는 이유는 부주의에서 올 수 있다. 이 역시 죄라 여길 수 있으나 부주의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혹은 내가 피할 수 있는 상황을 택한 결과인 것이다. 음식이 상하였다고 생각이 되면 먹지 않아야 하나 괜찮겠지 하고 먹었다가 탈나는 경우가 있다. 빌 2:30의 에바브로디도는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병이 들었다. 자신의 몸을 살피지 않은 까닭에 피곤함이 병이 된 것이다.

빌 2:25-30 그럼에도 나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는 자요 동료 군사요 또한 너희의 사자로서 내게 부족한 것들을 공급한 자인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라. 26 그가 너희 모두를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었으므로 심히 근심하였느니라. 27 참으로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그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긍휼을 베푸사 내가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염려하며 그를 보낸 것은 너희가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나도 근심을 덜고자 함이었느니라. 29 그런즉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또 그런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 30 나를 섬기는 일에서 너희의 부족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그가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거의 죽기에 이르렀느니라.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마귀의 시험으로 온다. 욥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니었으나 마귀의 시험으로 인해 온 몸이 병들어 괴로움 가운데 있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허락하신다. 종종 그것은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질병일 수 있다. 눅 13:10-17을 보면 한 여인이 나오는 데 이 여인은 사탄이 매이게 하여 십팔 년동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바울 역시 몸에 가시 즉 자신의 몸을 치는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하였다(고후 12:7). 그는 사도였음에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병이 “믿음”이 있으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에바브로디도를 치유할 수도 없었고 또한 디모데 역시 치유할 수 없었다.

모든 질병을 하나님께서 다 치유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평생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병이 치유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이유는 누군가의 죄들의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요 9:1-3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지도자로 보내려 할 때 그는 자신의 말이 둔하고 혀가 둔하다고 하면서 감당하지 못할 것을 주께 아뢰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출 4:11)

그러나 본문말씀을 보면 야고보는 당당히 말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고 치유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출 15:26) 즉 치유하시는 주로 제시하셨다. 우리는 모든 치유의 과정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치유하실 수 있고 혹은 일반적인 육체의 치유의 과정을 통해 하실 수 있으시다. 주님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신다. 내가 가진 병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라고 확신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는 확신을 버리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바울의 기도에 대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간구하지 말도록 하셨다.

고후 12:7-9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를 것이요,” 야고보는 “사도들”을 부를 것이요 하지 않았다. 당시 사도들은 이미 많은 수가 잠들었을 것이다. 사도들이 남아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고 치유를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로 하여금 의사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장로들이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자신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선포하도록 세우신 “목사들”을 언급한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갖는다.

사람이 병이 들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고 생각이 단순해진다. 때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몸의 병은 영적으로 약해진 결과를 보여준다.

시 32:3-5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였으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니 4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으로 변하였나이다. 셀라. 5 내가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며 또 이르기를, 내 범법들을 {주}께 자백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

교회의 목사들은 그에게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마음에 혹 회개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지 살피게 하고 또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확신을 갖도록 이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약성경에서부터 살펴보았듯이 믿음의 기도에 대해 응답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할지니라.”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로 만든 기름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건강과 치유를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교회의 목사들을 부르도록 한 것은 “믿음의 기도”를 위한 것이다. 기도는 또한 주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야고보는 사도들의 치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를 의지하였다.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용서받으리라. 16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 병의 많은 이유가 죄들로 인한 것이라면 먼저 죄들의 용서를 받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주님은 병든 자들을 치유하실 때 때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즉 중보기도하기를 기뻐하신다.

이제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응답하셨던 한 사람을 언급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18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하나님께서는 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는가? 그가 어떤 대단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성경은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 다시 기도하니”

왕상 18:42-44 이에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왕의 병거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그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까지 기도하였다. 하나님과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강하다. 그것은 많은 효력을 낼 것이다.

결론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못하는 병은 없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병을 허락하시고 치유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그의 마음이 자고하지 않도록 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을 때 먼저 자신을 살피길 원하신다. 많은 경우 병은 영적인 상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주께 드리길 원하신다. 그것을 위해 교회의 목사들을 부르라고 말씀한다. 주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기도에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르기를 원하시고 또한 그분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갖는 믿음의 기도를 원하신다. 치유를 위해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원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있는 목사들을 부르고 같이 기도함이 필요하다. 어떤 장소보다 어떤 마음을 소유하는가가 중요하다.

약5.14-18.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