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엡4.12-16
2013년 10월 20일 주일오전설교
제 10회 창립기념예배

건강한 교회

본문말씀: 에베소서 4장 12-16절

엡 4:12-16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13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14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15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6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력 있는 일에 따라 모든 마디가 공급하는 것에 의해 꼭 맞게 함께 결합되고 들어차서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서론

오늘 우리는 형제사랑침례교회로 모인지 제 10회 창립기념일을 맞이하였다. 제가 2010년 5월부로 이 교회의 목사로 부임한 이래 지난 수년간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긍휼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본다. 지금도 이 강단에 서 있지만 내 자신이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며 또 그런 능력이 있는지를 말한다면 나는 내 부족함을 고백할 것이다. 일과 사역을 병행함으로 여러분에게 드려져야할 많은 시간들이 그러지 못했음을 볼 때마다 또한 매 주마다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여러분과 4년을 달려왔는지가 신기할 뿐이다. 이 교회 즉 이 모임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우리가 계속해서 매 주마다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어떤 뛰어난 말이나 언변이나 사람들을 다루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매우 부족함을 느낀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있었기에 이 모임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적은 수가 모였기 때문에 재정내역서를 보면 이제 적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나 엄밀히 말하면 아직 우리는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재정을 채워주심으로써 이 교회로 하여금 유지케 함을 보아왔다. 올해부터 사랑의 선교헌금이 교회들로부터 중단되었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위험부담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이 명확한 가운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특히 교회의 목적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에베소서 4:12-16을 읽어보면 전체적으로 성경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장” 즉 자라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이 추구하는 양적 성장의 의미가 아니다. 물로 교회는 양적으로도 성장해야 한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실 때 관심을 갖는 부분은 사람들의 수가 많고 적음보다 각 지체들의 영적 성장에 있다. 성장하지 아니한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데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I.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이다.

엡 4:12-13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13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엡 4:15a 15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것이 “성장”“임을 보여준다. 성장이라 함은 정체되지 않고 자라나는 것을 말한다. 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그들은 어른이 되고자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성장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몸의 성장과 지적 성장이다. 아이들은 이 두 가지 부분에서 성장해야 한다. 가끔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어떤 아이들은 몸이 더 이상 크지 못하고 멈추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떤 약이나 충격으로 인해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경우이다. 반면 지적 장애를 겪음으로써 지적 성장이 멈춘 아이들도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에베소서 4장 11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사도, 대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 로마서 12장이나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들” 즉 은사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전 12:4 -11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 5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 6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10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런데 에베소서 4장은 이 구절들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은사로 구분할 수 없는 특별한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다. 즉 에베소서 4장에서 언급하는 것은 은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먼저 교회는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졌다. 그 다음 “복음 전도자”가 나온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복음 전도자였던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티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듣게 된다. 복음 전도자는 오늘날로 보면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일차적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 목사와 교사가 나온다. 우리 성경은 목사와 교사를 “목사 겸 교사”로 번역하여 한 사람의 업무로 해석하였으나 이것은 꼭 그럴 이유가 없다. 엡 3:5을 보면 동일한 형태로 사도들과 대언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서로 같지 않은 것처럼 목사들과 교사들도 같을 이유가 없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대언자들과 교사들였던 “바나바와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과 사울”이 등장한다. 이들은 목사였는가? 그렇지 않다. 목사의 첫 번째 조건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대언자와 사도와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각 교회들의 장로들 즉 지금의 목사들을 세웠지만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사람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감독의 일을 하는 목사들과 가르치는 교사들을 주신 목적은 “성장”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도록 위임을 받는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려 하지 않는다. 교회 소풍을 가거나 혹은 어떤 행사가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것을 소홀이 하거나 대충 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른 날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설교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있다. 여러분이 한 주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보낸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큰 손실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막 태동하였는데 그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였다.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구원받아야할 자들을 더해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주신 이유는 42절에 있다.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행 2:42) 그들은 네 가지를 행하는 일에 계속해서 하였다. 먼저 “사도들의 교리”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데서 게으르지 않았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자들을 축복하시고 또한 그들을 고귀한 자들이라 불렀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듣기를 기뻐하였으며 사도행전 17장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여 과연 그러한지를 살폈다(행 17:11). 그들은 “교제” 안에 머물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또한 함께 빵을 떼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 편이다. 대부분 이 구절이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면 빵을 떼는 것은 같이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몇몇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눅 24:35은 “주의 만찬”에서 빵을 떼는 것을 말한다. 행 27:35은 그냥 식사를 위해 빵을 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과 같은 기적을 일으켜 빵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마 14:19, 마 15:36). 사실 주의 만찬 자체가 함께 모여 빵을 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주식은 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의 만찬의 빵은 특별한 빵이었다. 일 년에 한번 있는 유월절에 드려지는 누룩 없는 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떼었던 빵은 매 주마다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함께 하는 식사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초대 교회는 매일같이 모여 함께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고 각 교회는 전통적으로 매주마다 모여 함께 식사를 하였을 것이다. 행 20:7을 보면 제자들이 빵을 떼려고 함께 모였다는 것은 매주 모인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만찬은 단순히 교회가 함께 식사를 하는 의미보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교회는 날마다 기도하는 교회였다. 이 네 가지를 꾸준히 함으로써 이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만일 우리 교회도 건강한 교회가 되길 원한다면 성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를 수행하는데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II. 성장은 믿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엡 4:13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아이들의 성장은 두 가지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언급했듯이 크리스천의 성장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과 지식이다. 베드로는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벧후 3:18)고 권면하였다. 아이들이 몸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적인 성장이다. 종종 부모는 이 부분을 소홀이 할 수 있다. 아이들의 몸이 성장하려면 먹어야 한다. 그런데 배고픔은 사람이 느끼는 통증이므로 매일 세끼를 먹게 되고 따라서 몸이 성장한다. 그러나 지적 성장은 그렇지 않다. 지적 필요는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지적으로 성장하려면 아이들은 머리로 먹어야 한다. 책을 계속 읽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약 아이들이 책을 잘 읽지 않으면 지적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은 아이들은 생각의 폭에 있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것은 그들의 지적 성장이 더 많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적 성장과 관련하여 주의할 것이 있다. 성경에서 아는 것은 단순하게 지식수준을 늘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란 단순하게 성경에 기록된 지식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이 지식들은 우리가 진짜 지식으로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진짜 지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에서 “알다”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부분에서 이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세기 4:1을 보면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창 4:1)라 말한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였다고 말한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앎이란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그것이 직적접이든 간접적이든 체험을 통해 내가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이와 같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것들을 배웠다. 그런데 내가 직접 “기도”하기 전까지는 나는 기도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할 때 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하여 기도는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의 단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내”에 대해 배운다 할지라도 내가 스스로 인내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힘들고 나를 짓누르며 생각을 괴롭게 하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인내함으로써 체험적으로 인내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결혼한 주부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책들을 통해 어떻게 아이가 태에 생겨나고 그것이 자라며 때가 되어 진통이 점점 심해져가다가 양수가 터져 아이가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를 체험적으로 낳아보기 전까지의 지식은 체험적으로 알 때와 완전히 다르다. 그 뒤로 아이를 낳아본 여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다른 여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단편적으로 머리에만 쌓아두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면 그것은 진짜 지식이 되지 못한다. 지혜는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근거로 간접적인 체험을 만들어 낸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의 단편적인 지식을 많이 쌓고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이들은 머리에만 머물러 있는 지식의 많음을 두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체험적으로 그것들을 알기 전까지 그것은 전혀 앎이 아니다. 때로 성경지식이 부족하나 삶을 통해 체험적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있고 더 큰 분별력을 지닌 경우를 보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자라나야 한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빌 3:7-8)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라 말하였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외한 모든 지식은 배설물이기 때문에 완전히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열심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핍박하였던 자였으며 율법에 있는 의에 대하여는 흠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은 그로 하여금 주님을 아는데 방해가 됨을 보았다. 그는 체험적으로 그 전에는 내가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어떤 이득이 되던 것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손실로 여겨야 함을 알았다. 때로 내가 가진 지식이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알아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내게 있어 손실과 같다. 만일 그 손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데 방해를 얻을 것이다.

나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주님을 여전히 지식의 단편 속에서 알고 있는가? 단순하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주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지식의 단편에 머물러 있다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을 더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더 뛰어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정도는 달라진다. 갑이라는 사람에 대해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과 만나서 한 시간정도 대화하면서 그 사람의 습관과 태도와 생각과 기호와 가치관등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변할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진실해보이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신뢰도는 상당히 올라갈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의 말을 믿기가 어려워 보이거나 행동이 수상한 점들이 발견이 된다면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예로 우리가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그렇다. 내가 얼마나 주님과 대화하고 그분을 경험하며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응답을 보고 말씀을 통해 그분에 대해 알아 가면 갈수록 주님에 대한 신뢰는 커질 것이다. 아무런 체험도 없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성장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단편 지식이 많은 것을 두고 자신이 믿음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가 변치 않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단련은 시험을 통해 온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단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지는 금을 단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ㄸ대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어떤 일들을 당하기 전까지는 주님에 대해 믿음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버릴지언정 자신은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 장담은 닭이 두 번 울 때에 거짓임이 드러났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시험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주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스스로 결정하여 움직이는가? 주님께서 내게 어떤 것을 주시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불평이 나를 지배하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 책망하시기도 하고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 책망하시기도 하며 큰 믿음으로 칭찬하던 백부장도 있었다. 큰 믿음은 주님께서 행할 것이란 신뢰를 갖는 것이며 작은 믿음은 주님께서 행하실 수 있으나 행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것은 주님이 행할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의 모습은 “작은 믿음”을 소유하였던 제자들과 다를바 없는가! 주님께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정작 나에게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용서할 수 있을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그리할 수 있는가?

제자들이 “우리의 믿음을 증대시켜주옵소서”(눅 17:5)라고 간구하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동일한 기도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라나야 한다.

III. 성장의 목적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나가기 위함이다.

엡 4:16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력 있는 일에 따라 모든 마디가 공급하는 것에 의해 꼭 맞게 함께 결합되고 들어차서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아이가 성장하기 전까지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이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녀들을 낳아 또 그들을 돌본다. 이제 자신만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성장의 목적도 그러하다. 12절에서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라 말하는 바와 같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성장함으로써 우리는 섬기는 일을 한다.

바울은 여기서 몸을 비유로 말하고 있음을 보자. 15절 후반부터 보면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6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력 있는 일에 따라 모든 마디가 공급하는 것에 의해 꼭 맞게 함께 결합되고 들어차서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온 몸”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지역교회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 자의 성장 뿐 아니라 서로 결합되고 붙들어 주는 일이 요구된다. 먼저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력 있는 일”이라 말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 각자의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필요함을 생각해보라. 우리 안에서 효력있게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각 자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공급을 받아 우리의 분량에 맞게 세움을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각자가 아니라 마치 몸의 모든 지체가 하나로 꼭 맞게 함께 결합되듯이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떼 사랑 안에서 하나로 유지될 수 있다.

엡 4:1-3 그러므로 [주]의 갇힌 자 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를 부르실 때에 허락하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걷고 2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3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온 교회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나가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은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줌”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일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마음이 맞지 않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하자. 만일 나와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원수가 되셨으나 나를 사랑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오래참고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것처럼 나 역시 그리스도를 체험을 통해 배우고 그분을 알아가자. 이 교회가 온 몸이 서로의 지체를 거부하지 않고 서로 잘 융화하고 받아주며 서로 섬기듯이 우리 역시 그러하자.

IV. 성장의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 5:15b-16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6 그분으로부터 온 몸이 각 부분의 분량 안에서의 효력 있는 일에 따라 모든 마디가 공급하는 것에 의해 꼭 맞게 함께 결합되고 들어차서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느니라.

만일 우리가 내 스스로 내 힘으로 이것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곧 제 풀에 쓰러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이다. 교회의 몸의 성장의 공급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얻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각자가 머무르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벧전 4:11 누구든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하는 것 같이 하고 누구든지 섬기려거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 같이 그 일을 하라. 이것은 모든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분께 찬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모든 일에서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으로 섬김을 고백하자. 또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힘 주실 것을 확신하고 그분을 신뢰하자. 그분은 우리의 공급자이시다.

결론

엡 4:14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어린 아이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몸은 어른인데 생각은 아직 성장하지 못하였다면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속이는 말들을 들었을 때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냥 모든 말들을 믿어버리거나 혹은 모두를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 의지하게 된다. 예전에 여호와의 증인에 있다가 우리 교회에 잠깐 다녔던 한 자매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몸이 자라듯이 그의 지적 성장도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다.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엡4.12-16.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