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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7.1
2016년 5월 29일 주일오전설교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 11

전능자 하나님

본문 말씀: 창세기 17장 1절

서론

오늘은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 11번째 시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살아계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께 믿음과 신뢰를 두도록 이끄신다. 그 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주님은 그들에게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더욱 계시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이끄신다. 15장에서 주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을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라고 계시하셨다. 16장에서 주님은 하갈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하갈은 주의 이름을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 불렀다. 1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엇으로 계시하시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

I. 침묵의 기간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님은 그에게 자신을 보이셨다. 주님께서 자신을 마지막으로 아브람에게 보이셨던 때는 창 15장이었다. 그 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혜대로 하갈을 아브람의 씨받이가 되게 하였고 그녀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으며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신을 보이지 아니하던 때는 약 14년에서 1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주님은 왜 이 기간 동안 자신을 아브람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는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혹자는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신의 지혜대로 걸었던 불순종에 대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십오년 간 침묵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의 행동은 하나님의 계획을 명확히 알지 못한 데서 오는 믿음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이지 불순종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단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으리라 판단된다. 당시 아브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받았으나 주님은 더 이상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며 또한 그에게 주어진 약속은 마치 공허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많은 크리스천들이 겪게 될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기간이다. 이것은 꼭 크리스천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아 그분과 교제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기 전까지 주님은 우리와 교제를 멀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는 변화가 없다. 그것은 영원한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가정에 자녀와 부모의 사이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경우 교제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과 믿음의 도약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침묵하시는 때를 두시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예를 욥에게서 볼 수 있다. 욥은 당대 의인이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시험과 환란과 고난을 당했으나 주님은 그에게 어떤 것도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의 친구들마저 그를 악한 자로 보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주님은 정해진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욥이 당한 모든 고난에 대해 모든 것을 회복하도록 하셨고 또한 두 배의 축복을 주셨다. 그것을 통해 욥은 자신의 의에 대해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었다. 자신이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는 더러운 것임을 본 것이다. 또한 주님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영적 존재의 실체에 대해 보여주셨다. 욥기 41장은 바로 이 존재에 대해 말한다.

아브람과 사래의 상황을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명확히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은 까닭에 특히 사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명확히 게시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자기들의 지혜대로 걸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금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행위는 당시의 기준에 부합한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눈에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이 한 육체를 이룰 것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마 19:4-6 그분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에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거늘

그렇다면 주님은 왜 약 15년이라는 세월동안 아브람에게 침묵하셨는가? 이것은 크리스천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떤 죄를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주님 앞에서 그분의 뜻이 되는 것을 구하며 걷는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시는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으며 내가 마치 허공에 기도하는 자 같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나 알지 못하고 마치 내가 어둠 가운데 놓인 것 같은 때가 크리스천에게 임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영적 성장과 믿음의 도약을 위해 이것을 허락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거나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 크리스천은 자신의 믿음의 도약을 위해 자신의 실제적인 믿음이 어떠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입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믿음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처럼 흑암에 놓인 것 같은 크리스천은 인내로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할 때까지 즉 그분의 뜻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자신의 믿음이 자신의 입술의 고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브람은 이 15년의 기간 동안에 그 사이에 이스마엘은 태어났고 자라나 이제 열세 살이 되었다. 이삭이 주어지기까지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이었으며 그것도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대상이었다. 과연 아브람은 이 이스마엘을 보면서 그 아이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는 씨로 보았을까 아니면 믿음으로 다른 씨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창 17:18이 보여주듯이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그의 유일한 혈육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는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어딘가에서 아직까지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자신들에 대해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것은 17절에서 분명하게 보여진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오? 구십 세인 사라가 낳을 수 있으리오? 하고” 크리스천이 흑암에 놓일 때 만일 그가 인내로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불가능한 것이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계산을 자신의 머리로 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것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믿음의 도약으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린다면 그에 대해 보상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연약함 가운데 놓여 있다할지라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바로 우리의 믿음의 도약을 위해 일하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람의 삶에서 그 동일한 예를 발견하게 된다.

II. 전능자 하나님

1절을 보자. 아브람이 구십구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셨다. 이제 아브람에게 육신을 의지할만한 어떤 소망도 끊어졌고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심에 있어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을 아브람에게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전능자 하나님”은 원어로 “엘샤다이”이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어왔다. 키드너는 “충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석하였으며 클라크는 “샤다”를 “붓다”(pour)로 해석하여 “축복을 부으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하였다. 반하우스(Barnhouse)는 “샤드”가 히브리말로 “가슴”이란 뜻이며 그렇기에 남자의 가슴의 힘 혹은 여자의 가슴이 주는 위로와 편안과 공급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루폴드(Leupold)는 “샤다이”의 어근이 “샤다드”이며 그 의미는 “권능을 보이다” 란 뜻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 성경에 “전능자”가 오게 된 것은 칠십인역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칠십인역에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모든 것에 자신의 손을 두시는 분”의 의미이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왔다. 15장에서 자신을 “방패와 보상”으로 계시하셨을 때에도 그분께서 아브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을 “전능자”로 계시하시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A. 약속을 성취하실 수 있으신 분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마음을 아셨다. 앞서 보았듯이 아브람은 15년의 기간 동안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사래와 자신이 정한 대로 이스마엘이 하갈을 통해 태어났고 그가 유일한 상속자였다는 점으로 인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해 확신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말한다. 즉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말한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주님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며 이제 내가 그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크리스천이 흑암에 놓여 있는 기간에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말하지만 그의 믿음은 얼마나 흔들리며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얼마만큼의 확신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모습은 마치 아브람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18장으로 가서 보면 주님은 한 번 더 아브람에게 오셨고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사래가 엿듣게 되었는데 그녀는 주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다.

창 18:10-14 그분께서 이르시되,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확실히 네게 돌아오리니, 보라, 네 아내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라가 그의 뒤에 있던 장막 문에서 그것을 들었더라. 11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 많아 연로하고 또 사라에게는 여인들의 관례에 따른 것이 멈추었더라. 12 그러므로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이르되, 내가 늙었고 내 주도 늙었은즉 내게 즐거움이 있으리오? 하매 13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정말로 아이를 낳으리오, 하느냐? 14 {주}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한 때에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로 사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도약하게 하려는 주님의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갖는 것보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가르친다.

렘 32:27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라.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눅 1: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 하니라.

우리는 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계시며 이 이름은 곧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과 야곱에게까지 전수된 이름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칠 때 바로 이 이름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가르쳤다.

창 28:3 [하나님] 곧 [전능자]께서 네게 복을 주셔서 너를 다산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사 네가 수많은 백성이 되게 하시고

창 35:11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 곧 [전능자]니라. 다산하고 번성하라. 민족과 민족들의 무리가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43:14 [하나님] 곧 [전능자]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가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내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하니라.

창 48:3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 곧 [전능자]께서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내게 나타나 내게 복을 주시며

창 49:25 그것은 곧 네 아버지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나니 그분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요, 또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분께서 네게 복을 주시되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 놓인 깊음의 복과 젖가슴의 복과 태의 복을 주시리로다.

출 6:3을 보면 이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시하신 이름이었음을 말한다.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런 연유로 킹제임스성경에서 여호와를 의미하는 주의 이름에 대해 고딕체 주로 표현하고 있다. 출 6:3이 창 22:14의 여호와이레를 제외하고 킹제임스 성경에서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주로 표현되지 않고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전능자 하나님”이란 이름을 처음 계시하신 때가 창세기 17장이다. 주님은 자신이 “전능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해 아브람의 육신의 모든 소망이 꺽이기를 기다리셨다. 아브람이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과 지혜로는 성취되기에 불가능한 것이라 여길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셨다. 그것을 통해 주님은 자신에게 능히 불가능 한 것이 없음을 보이고 또한 아브람의 믿음이 그것을 통해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셨다.

로마서 4장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4:19-21 그가 백 세쯤 되었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이제는 죽은 자기 몸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가 죽은 것도 고려하지 아니하였으며 20 믿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으니

17장을 보면 우리는 오히려 의심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 불신 가운데 있는 아브람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와 사래를 통해서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불신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롬 4장의 기록과 대조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문제로 인해 신학자들 가운데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이 불신 가운데 주님께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환희 가운데 그렇게 말한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것은 억지와 비슷한 해석처럼 보인다. 17장에서 아브람은 실제로 불신 가운데 있었으며 18장을 보면 사래는 여전히 불신 가운데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롬 4장은 언제를 바라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바울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혹은 더 후의 일인가? 사실 롬 4장의 이야기는 창 17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로 창 17:23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이 도약하는 것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람은 주님의 모든 말씀을 들었을 때 더 이상 불신이 자기 마음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언약의 표적인 할례를 자신과 이스마엘과 그의 집에 속한 모든 남자에게 그 날 행하였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자신을 “전능자”로 계시하시고 그와의 언약을 다시 확증하셨을 때 자기 마음 안에 있던 모든 불신의 안개와 구름을 그분의 빛 아래 흩어버렸다. 그리고 그분을 다시 한번 강하게 믿음고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증표로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자기부터 시작하여 모든 남자들에게 시행하였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믿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다고 말한다.

B. 영원한 언약을 체결하실 수 있으신 분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제시하신 것은 바로 그분께서 “영존하는 언약”을 체결하실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창 17:19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또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워 영존하는 언약이 되게 하리라.

만일 누군가가 언약을 체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언약을 수행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수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언약을 체결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이삭과 그 씨와 더불어 “영존하는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누가 영존하는 언약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영원히 살아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주님은 그 영존하는 언약을 수행할 적임자로 자신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제시하고 계신다. 주님은 능히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님은 그 씨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존하는 언약을 세우셨다. 바울은 갈 3:17에서 그 점을 명확히 밝혔다.

갈 3:16-17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창 17장에서 믿음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주셨다. 바울은 할례를 두고 말하기를 “할례의 표적 곧 아직 할례 받지 않은 때에 그가 소유한 믿음의 의를 봉인한 표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시는 영원한 언약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어도 그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롬 4:5-8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 6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된 일을 묘사하여 7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8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세우신 언약이다.

마 26:26-28 ¶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히 10:16-17 그 날들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뒤에 17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실 수 있으신 “전증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그 언약을 공표하셨고 효력을 갖게 하셨다. 오늘날 누구든지 그분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와 주님은 이 영원한 언약을 체결하실 것이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과연 그분을 그렇게 온전한 믿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각과 계산과 지혜로 그분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분은 또한 영존하는 언약을 체결하실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그분께 나아오라. 그분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신다.

창17.1.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