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창23.1-20
2016년 8월 7일 주일오전설교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서 - 21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다

본문 말씀: 창세기 23장 1-20절

서론

인생의 길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은 죽음을 숙명이라 말한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라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기도 하고 우리의 생명이 다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그 일을 당할 때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브라함 역시 사랑하는 자를 잃는 슬픔을 겪고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또한 한국의 장례 문화와 관련한 점들을 보고자 한다.

I. 헤어질 때(1-2절)

창 23:1-3 사라는 백이십칠 세였는데 이것이 사라가 누린 삶의 햇수더라. 2 사라는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는데 바로 그곳은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이니라. 아브라함이 와서 사라로 인해 애곡하며 그녀로 인해 울었더라. 3 ¶ 아브라함이 자기의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 헷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성경에서 유일하게 살아온 연수를 기록한 여인은 사라가 전부이다. 그녀의 나이 백이십칠세로 당시 이삭의 나이는 37세였다. 이삭은 사라가 90세에 낳은 아들이었다. 사라는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롤 모델로 제시되는 여인이다.

벧전 3:5-6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主)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너희가 잘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딸들이 되느니라.

물론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이 언제나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 죄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지만 우리 중 죄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있는가?

2절에서 사라는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주변을 보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라. 혹은 여러분의 남편, 아내 혹은 그 누가 되었든지 우리가 갈라지게 되는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 일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 주님이 오시면 주님은 더 이상 눈물도 없고 슬픔과 사망과 괴로움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죽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면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보게 되면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보고 그의 마음이 괴로워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와서 사라로 인해 애곡하며 그녀로 인해 울었더라.”라고 말한다. 이유를 알지 못하나 사라가 죽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있지 못하였을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우는 것은 자연적인 반응이다. 본성적인 애정이 없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롬 1:31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딤후 3: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언제나 대비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것을 이겨내기까지 우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다.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가진 자연적인 감정이나 이것을 부정하려는 한국교회들도 있다. 그들은 크리스천은 죽음을 보고 울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진리가 아니다. 그런 가르침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들은 슬퍼하며 울었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슬픔을 함께 하였으며 예수님께서도 그곳에 가셔서 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도르가라 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 행위를 심히 많이 한 여인이었고 많은 과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모든 과부들은 그녀의 곁에서 슬피 울었다.

그러면 많은 한국교회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에스겔 24:17을 인용한다.

겔 24:16-17 사람의 아들아, 보라, 내가 한 번 쳐서 네 눈이 바라는 것을 네게서 빼앗을지라도 너는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며 17 울부짖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지도 말며 네 머리의 수건을 네 몸에 두르고 네 발에 신을 신으며 네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의 빵을 먹지 말라, 하시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네 눈이 바라는 것” 즉 그의 아내를 빼앗는다 하여도 “애곡하거나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며 울부짖는 것을 자제하고 그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지도 말”것을 명령하신다. 문제는 이 구절이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인가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에스겔에게 왜 주셨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보여주시고자 그의 아내를 표적으로 삼아 에스겔에서 취하여 가신 것을 말한다. 21-24절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표적을 주신 이유를 밝히 설명한다.

겔 24:21-27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성소 곧 너희 기력의 뛰어남이요, 너희 눈이 바라는 것이며 너희 혼이 딱하게 여기는 곳을 더럽히리니 너희가 남겨 둔 너희 아들딸들이 칼에 쓰러지리라. 22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가 행하리니 곧 너희가 너희 입술을 가리지도 아니하고 사람들의 빵도 먹지 아니하리라. 23 또 너희가 너희 수건을 머리 위에 두르고 너희 신을 발에 신고 애곡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고 오직 너희 불법들로 인하여 쇠약해지며 서로 바라보고 애곡하리라. 24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적이 되었나니 그가 행한 모든 것대로 너희도 행하리라. 이 일이 이를 때에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5 너 사람의 아들아, 또 내가 그들에게서 그들의 기력과 그들의 영광의 기쁨과 그들의 눈이 바라는 것과 그들이 마음을 두는 것과 그들의 아들딸들을 취하는 날 26 곧 그 날에 도피하는 자가 네게 와서 너로 하여금 네 귀로 그것을 듣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27 그 날에 네 입이 도피한 자를 향하여 열리므로 네가 말하고 다시는 말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들에게 표적이 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그것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그들의 성소를 더럽히게 되도록 내버려 둘 것이며 또한 그들의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극한 슬픔으로 인해 아무 것도 입으로 가져가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계속적인 위협과 전쟁 가운데 있을 것이기에 그들을 위해 애곡하거나 울 여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17절의 말씀은 전혀 크리스천들을 향한 말씀도 아니고 유대인들조차 그 명령을 죽은 자들을 향한 말씀으로 자기들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에스겔에게 표적으로 주신 일시적인 명령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이 구절이 개역성경으로 보면 더 문제가 있는 구절이 된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겔 24:17 개역)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여 가족의 한 사람이 죽으면 애곡하지 말고 슬픔을 억누르며 조용히 탄식하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의 빵을 개역성경은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로 번역하였는데 이로 인해 한국교회들 중에는 초상집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먹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여기 사람들의 빵은 초상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이 아니라 22절처럼 슬픔으로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게 될 상황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의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라고 말한다. 이것은 애곡하는 날들이 끝났으며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슬픔 가운데 자신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보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슬픔과 눈물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그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계속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 속에 슬픔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계속해서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나”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을 슬픔 아래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슬픔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때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에게는 더 엄중한 명령을 주셨다.

레 21:10-12 자기 형제들 가운데서 기름 부음에 쓰는 기름으로 머리에 부음을 받고 거룩히 구분되어 의복들을 입은 대제사장은 자기 머리를 드러내지 말며 또 자기 옷을 찢지 말고 11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며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로 인해서도 자기를 더럽게 하지 말고 12 성소에서 나가지 말며 자기 [하나님]의 성소를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그의 [하나님]의 기름 부음에 쓰는 기름의 관이 그 위에 있느니라. 나는 {주}니라.

특히 크리스천의 죽음을 대할 때 우리가 구원받은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을 두고 오랫동안 자신을 슬픔 아래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살전 4:13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II. 신실함의 때(3-16절)

창 23:4-16 나는 나그네요, 너희와 함께 머무는 자니라. 너희 중에서 내게 소유 매장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눈앞에서 옮겨 묻게 하라, 하매 5 헷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에게 응답하며 그에게 이르되, 6 내 주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강력한 통치자시니 우리의 돌무덤 중에서 좋은 것에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우리 중의 아무도 자기의 돌무덤을 당신에게 주지 아니하여 당신이 당신의 죽은 자를 묻지 못하게 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의 백성 곧 헷의 자손들을 향해 몸을 구부리고 8 그들에게 이야기하여 이르되,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눈앞에서 옮겨 묻게 하는 것이 너희 생각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해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간청하여 9 그가 그의 밭 끝에 있는 그의 소유 즉 막벨라의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값나가는 대로 돈을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너희 가운데서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0 에브론이 헷의 자손들 가운데 거하였는데 헷 족속 에브론이 헷의 자손들 곧 자기 도시의 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11 아니니이다.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백성의 아들들 앞에서 당신께 드리고 그 안에 있는 굴도 드리니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하매 12 아브라함이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혀 절하고 13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러나 네가 그것을 줄진대 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내가 그 밭 값을 네게 주리니 내게서 그것을 받으라.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묻겠노라, 하매 14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응답하며 그에게 이르되, 15 내 주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그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니이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하니라.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헷의 아들들이 듣는 데서 그가 지정한 대로 상인들이 널리 쓰는 돈으로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니라.

이때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62년의 해수가 흘러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4절에서 아브라함은 무어라 말하는가? “나는 나그네요 너희와 함께 머무는 자라.” 그는 여전히 약속의 땅에서 어떤 부분도 자신의 소유로 땅을 소유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주시기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의 믿음에서 여전히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다만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돈으로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묻는 매장지로 일부를 구매하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땅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보았던 것은 바로 그가 바라고 있는 본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히브리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건축자이시고 설계자이신 한 도시를 바랐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볼 때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정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쳐가는 나그네이자 순례자라는 점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보고 그것들을 내려놓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전도서는 사람의 죽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전 7:2-4 ¶ 애곡하는 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그것이 모든 사람의 끝이기 때문이라. 살아 있는 자는 그것을 자기 마음에 두리라.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으니 이는 얼굴의 슬픔으로 인하여 마음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라. 4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애곡하는 집에 있으나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희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4-16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죽은 자 사라를 묻기 위해 헷 족속의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원하는 땅을 거저 줄 것을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반드시 값을 치르고 살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롬 13:8의 의미를 보여준다.

롬 13: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을 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였다. 심지어 그는 에브론이 그 땅의 값을 비싸게 불렀음에도 그 불러진 금액 그대로 지불함으로써 어떤 것도 빚지지도 않으며 그들 앞에서 완전하게 걷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씨에게 소유로 주실 것이란 약속을 갖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럼에도 그는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과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아브라함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또한 그들이 부른 대로 “강력한 통치자”로서 완전하게 걷고자 하였다.

종종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삶이 헤이해지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혹은 반사교적인 모습을 갖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그 전과 동일한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자신의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슬픔을 이겨내라고 이끌며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가야할 길을 걸으라고 이끈다.

III. 믿음의 때(17-20절)

창 23:17-20 ¶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던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그 안에 있던 굴과 그 밭과 사방 모든 경계에 있던 모든 나무가 18 헷의 자손들 앞에서 즉 그의 도시의 문에 들어온 모든 사람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니라. 19 이 일 뒤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마므레 앞 막벨라의 밭 굴에 묻었는데 바로 그곳은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이니라. 20 그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을 헷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소유 매장지로 확정하였더라.

아브라함은 막벨라에 있던 에브론의 밭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산 후 거기에 사라를 묻었다. 후에 아브라함 역시 이곳에 묻혔고 이삭과 리브가가 거기에 묻혔으며 야곱은 죽기 전 자신을 이곳에 묻어달라고 요셉에게 요청하였다. 요셉 역시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 자신의 뼈를 가져다가 그곳에 묻을 것을 명령하였고 그들은 그 일을 수행하여 이집트에서 올라오면서 그의 관을 가지고 와서 바로 이 막벨라의 굴에 묻었다. 막벨라의 이 굴은 그들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셨음을 인지하는 하나의 장소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자기의 아내를 다른 곳에 묻을 수도 있었음에도 그곳을 택하였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에 속한 지역이었음을 마음에 두라.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서 약 400년가량 있다가 올라올 것을 예언적으로 그에게 보여주셨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단지 그의 아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씨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앞으로 이 땅이 그의 씨에게 속한 땅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서 그 땅을 사고 거기에 매장지로 삼았다. 그에게 약속의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그 때에도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다. 히브리 기자들은 이들을 두고 이렇게 기록한다.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히 11:13)

IV. 한국의 장례문화

우리는 한국교회의 장례와 관련한 부분을 이미 조금 언급하였다. 한국의 장례문화에서 잘못된 것들과 또한 기독교에서 잘못 가르쳐지는 부분들을 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저 역시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피하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더 이상 변화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톨릭에서는 연옥을 가르치며 우리의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그들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 가르치지만 그것은 거짓 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옥에 대해 가르쳐본 적이 없으시다. 죽은 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거나 혹은 구원받지 아니하였다면 지옥으로 내려간다. 오늘날 마귀의 영들이 죽은 자들의 영들을 흉내 내어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여러분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이유가 없다. 초상집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면 그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라. 다만 한국교회에서 이 증거 구절로 언급되는 구절이 잘못 인용되고 있어 그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기도하지 아니하는 이유로 인용하는 구절은 사 8:19이다.

사 8:19 ¶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슬쩍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들에게 구하라, 할 때에 백성이 마땅히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죽은 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구절을 얼마나 잘못 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는지를 보라. 주님은 여기서 “죽은 자”를 말할 때 실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하고 계신다. 그들은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슬쩍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들”을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무당이나 점치는 자들이다.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무당이나 점치는 자들 혹은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어떤 교제도 원치 아니하신다. 주님은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죽은 자들일 뿐 아니라 그들은 악한 영들과 교제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벨리알과 무슨 몫을 함께 하실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돈을 쓰지 말라고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다. 그것은 낭비이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 그 증거 구절로 말하는 구절은 신 26:14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문맥의 의미를 위해 14절만이 아니라 12절부터 보도록 하겠다.

신 26:12-14 ¶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너는 네 소출의 모든 십일조 드리기를 마치고 그것을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어 그들이 네 성문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13 그때에 너는 {주} 네 [하나님] 앞에서 아뢰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주의 모든 명령대로 내가 거룩한 것들을 내 집에서 가져다가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에게 주었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들을 범하지도 아니하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그것을 먹지 아니하고 부정한 용도로 그것에서 조금도 떼어 두지 아니하였으며 죽은 자를 위하여 그것에서 조금도 주지 아니하고 {주} 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사오니

14절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것에서 조금도 주지 아니하고” 이것이 죽은 자를 위하여 조금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행한 바였던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둘 곳을 지정하여 자기 돈을 사용하였는지를 생각해보라. 주님은 그분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칭찬하셨고 또 그분의 발을 향유를 부어 머리카락으로 씻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그 구절을 보면 12절에서 문맥은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십일조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을 성경은 “거룩한 것들”이라 부르고 있다. 바울 역시 신약 고전 9장에서 십일조를 거룩한 것들이라 불렀다. 이 사람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십일조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님께 아뢰고 있을 뿐이지 죽은 자들을 위해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였을 때 그것은 반드시 그분의 영광과 의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를 원하셨다. 십일조는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부르셨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은 제사 문화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제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이다. 먼저 성경에서 이와 관련한 부분을 보고자 한다.

시 106:28-30 그들이 또한 스스로 바알브올과 연합하고 또 죽은 자들의 희생물을 먹어서 29 이같이 자기들이 창안한 것들로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므로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도다. 30 그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심판을 집행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일반적으로 제사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구절이 시 106:28절이다. 여기 보면 “죽은 자들의 희생물을 먹어서”로 되어 있다. 개역성경을 보면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번역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조금 더 제사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번역이 되었다. 이 구절은 민수기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말씀이다.

민 25:1-3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무르며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하니라. 2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릴 때에 백성을 부르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니라. 3 이스라엘이 스스로 바알브올에게 연합하였으므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니라.

민수기 25:1-3을 보면 시 106:28에서 죽은 자들에 해당하는 것이 “신들”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신들은 거짓이며 그것들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므로 죽은 것이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106:28의 죽은 자들에 대한 해석이다. 혹은 실제로 죽은 자들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신들로 섬기는 풍습이 있음을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의 제사 역시 그러한 토대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신”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민 25장에서 모압의 신은 바알브올이며 이 의미는 브올의 주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 신은 그모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신을 섬기는 방식은 이 신을 믿고 섬기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사람들과 창녀짓을 행한다. 그런 연유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모압의 딸들과 행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리고 그들에게 절하고 숭배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것과 한국의 장례문화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한국은 누군가 죽게 되면 그 사람의 생일이 되면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피해야할 부분이다. 크리스천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또한 죽은 자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여 그들을 기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그들에게 절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마귀를 섬기는 상일 뿐이다. 그들을 귀신이라 부르며 마치 돌아온 것처럼 여기며 사람들에게 복 혹은 저주를 주는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전 10:13-21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나의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 15 내가 지혜로운 자들에게 말하듯 말하노니 너희는 내가 말하는 바를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 17 우리가 많아도 한 빵이요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그 한 빵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18 육체를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희생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은 무엇이며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은 무엇이냐? 20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나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으며 [주]의 상과 마귀들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느니라.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고 절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을 때에 필요한 것이며 죽은 이후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조상들을 그들의 축복과 저주를 주는 자들로 마치 신처럼 섬기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이것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는 것과 제사를 지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제사는 그들을 신들로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제사를 지내게 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고전 8:10-11 지식이 있는 네가 우상의 전에서 음식 앞에 앉은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약한 그 사람의 양심이 담대하게 되어 우상들에게 바친 그것들을 먹게 되지 아니하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한국교회 중 여기서 “멸망하리니”를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교회들이 상당수가 있다. 그들은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할지라도 제사를 지내면 구원을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멸망”(perish)으로 사용된 단어는 대부분 구원받지 아니한 것과 연관지어 사용되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있을 때 풍랑이 불러 배가 위태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한 말은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였다. 여기서 “죽는 것”이 동일한 perish란 단어이다. 혼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전 8:11 역시 혼의 구원과 관련한 것이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의 삶 혹은 양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은 롬 14:15-23의 조명 가운데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롬 14:15-23 그러나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18 이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느니라.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을 이루는 일들과 서로를 세워 주는 데 필요한 일들을 따를지니라. 20 음식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망하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이 참으로 순수하되 실족하게 하며 먹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즙도 마시지 아니하며 네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실족하게 하거나 약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선하니라. 22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너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허용하는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를 받나니 이는 그가 믿음을 따라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따라서 제사를 설령 지냈다고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제사를 피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상숭배이며 옳지 못한 실행이다.

결론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었을 때 슬픔에 빠져 있지만 않았다. 그는 죽은 자 앞에서 일어났다.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을 대하는 일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할 때 그러할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믿음 안에서 걸으며 믿음으로 슬픔을 이겨내어 일어나라.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하라.

창23.1-20.txt · 마지막 수정: 2017-06-20 09:04 (외부 편집기)